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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바람이 부나 보다. 축축 늘어진 커다란 야자수 잎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단단한 몸통에서 뻗어나온 놀라운 유연성이다.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진 않을 태세니까.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진 않는다는, 대나무의 철학과는 반대편에 서 있지 않은가. 세상에 살아남는 방식이 한 가지뿐이라고 우기는 일은 그저 못난 사람들의 몫인가 보다.
그나저나 참으로 이국적인 전경이다. 하얀 벽마다 세운 게 온통 야자수뿐이니.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되레 바람을 일으켜 제 세상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묘한 일이 아닌가. 들여다볼수록 다른 장면이 보이는 거다. 저 잎선이 그어낸 ‘획’이 말이다. 한국화나 동양화에서나 볼 법한 ‘일필휘지’다. 숨 한번 고르곤 선 하나 긋고, 숨 한번 멈추곤 면 하나 들이는, 붓으로 향할 수 있는 가장 강직하고 가장 부드러운 길.
이 생각 저 감상, 한참을 풀어낸 뒤 그이를 만났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갤러리조은에 펼친 개인전 ‘블루밍’(Blooming)에 푸르고 붉은 야자수를 참 많이도 심어놓은 바로 그이다. 자그마한 체구로 어찌 저 거대한 야자수를 품겠다 했을까. 시작은 가벼웠다고 했다. “15∼16년 전쯤 됐을까. 선생님이 LA의 한 화랑 개인전에 초대받아 미국에 처음 갔을 때다. 샌디에이고 2층 숙소 창 앞으로 늘어져 있는 야자수가 얼마나 멋지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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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승연례(73). 엄밀히 말하면 ‘신진작가’다. 2017년 첫 개인전 이후 이번이 세 번째, 갤러리조은에선 2년 만이다. 이제야 ‘작가’란 타이틀의 어색함을 어느 정도 덜어냈을 터다. 하지만 붓과 물감, 캔버스를 다루는 일에선 ‘이골이 났다’고 할까. 아직도 ‘선생님’이라 부르는 작가 이건용(80)의 아내로 평생을 살아왔으니까. ‘국내 1세대 행위미술가’로,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하다 할 이 작가가 그이의 남편이다.
그러니 상황은 이렇게 정리가 된다. 평생 바쁜 남편을 내조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일흔을 앞둔 나이에 ‘늦깎이작가’로 데뷔를 했고, 야자수 저 큰 잎을 일필휘지로 휘두를 수 있을 만큼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중이라고. 게다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이태 전 개인전에 비해 “훨씬 정교하고 풍성해졌다”는 게 화단의 평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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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일필휘지로 ‘그어낸’ 서양의 야자수
신작 40여점을 건 개인전은 오로지 야자수만으로 화면을 채우고, 그 화면만으로 전시장을 채웠다. 그럼에도 똑같은 야자수는 없다. 적어도 작가의 야자수는 정물이 아니라 풍경이란 얘기다. 살아온 풍경, 살아갈 풍경.
첫 개인전만 해도 야자수는 “추상정원에 그려넣은 여러 꽃나무 중 하나”였다. 야자수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단다. 2017년 그해 홍콩아트페어에서 덜컥 야자수 그림이 팔린 거다. “벽에 세워둔, 정식으로 걸지도 않은 그 소품을 어느 홍콩인이 사가더라.” 이런 ‘신기한’ 일에 자신감을 얹어준 건 이 작가의 한마디였나 보다. “당신, 국제적인 작가네!”
또 이런 일도 있었단다. 한 평론가가 ‘이건용 작가’ 일로 방문했다가 거실에 걸어둔 40호 남짓한 야자수 드로잉 한 점을 보고 감탄을 했다는 거다. “이 작가님, 그림 참 좋습니다!” 언뜻 오인할 수도 있겠다 싶다. 이 작가의 연작 ‘바디스케이프’에 휘감긴 붓질이, 바람기 잔뜩 머금은 야자수의 늘어진 잎처럼도 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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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란 소재만큼, ‘크레파스’를 도구로 삼은 점도 독특하다. “대학시절 유화물감을 쓸 때 냄새로 고생했던 기억 때문인지. 크레파스나 색연필은 무향이라 부담이 없다. 물감이 필요할 때는 아크릴을 쓰고, 변화가 필요할 땐 오일파스텔을 쓰기도 한다.”
실제로 이번 전시작은 그 각각의 재료를 온전히 살려낸 3색 야자수가 무성하다. 종이에 올린 크레파스 드로잉 ‘야자수’(Palm Tree·2022), 캔버스에 아크릴물감을 얹어 그려낸 ‘야자수’(2021·2022), 캔버스에 크레파스와 아크릴물감, 오일파스텔까지 버무려 세운 ‘야자수’(2022) 등. 내친김에 일필휘지의 기법에 대해서도 물었다. “맞다. 한숨에 그어낸다. 그래서 갈아엎은 화면이 여럿이다. 선이 한번씩 잘못 나가면, 그땐 캔버스 전체를 다른 밑칠로 덮고 다시 작업해야 한다.” 망친 일필휘지는 화선지를 구겨버리는 것으로 해결했던 옛 동양화적 방식의 서양화적 버전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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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이건용 작가 내조로…‘좀더 빨리’에 대한 미련은 없어
부부는 사제지간이었다고 했다. 그래선지 승 작가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지금도 ‘선생님’이다.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정확히 들을 순 없었지만 인연은 ‘서라벌예대’가 놔줬을 거다. 1971년 승 작가가 졸업한 서라벌예대에 이 작가도 한때 적을 뒀더랬다. 다른 자리에서 만난 적 있는 이 작가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는데. “야간에 서라벌예대를 다녔지. 간호사였던 어머니에게 의지해야 하는 형편 탓에. 어머니는 꼭 홍익대 미대를 보내고 싶어하셨고. 그래서 시험만 보자고 했어. 데생 실기에 아폴로의 뒤통수를 그렸는데, 당시 학장이던 김환기 선생이 물으시데. ‘왜 뒤통수를 그렸느냐’고. ‘특별한 걸 그리려 했다’고 대답했어. 그러곤 합격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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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뒤통수’를 끝내주게 그렸던 젊은 시절 이 작가는 그렇게 1967년 홍익대 미대를 졸업했고, 이미 1970년대부터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뻗어나갔다. 그 세월의 틈새서 만나 이 작가의 아내가 된 승 작가는 남편의 특출난 기량 앞에 붓을 내려놓는 일을 당연한 듯 여겼을 거다. 그래. 이 작가는 평범한 ‘그림쟁이’는 아니었으니까. “그 시절은 순종이 미덕이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군산시절(이 작가가 군산대 교수로 재직하던 때)부터 서울을 오가는 자동차 운전, 스케줄 관리는 도맡아 한, 내조에만 만족했더랬다.”
그렇다고 ‘좀더 빨리였으면’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란다. “바삐 살아야 했던 상황 탓에 그리되지 않았나. 농담일지언정 ‘당신은 뉴욕에 가서 전시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선생님의 강력한 후원까지 받고 있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덕분에 이제야 ‘그일’도 할 수 있게 됐다니까. “건강에 문제가 생겨 고통스러웠던 지난 10여년 간, 한밤중에 색연필로 드로잉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중에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면 내 그림을 좋아해주는 복지관에 잔뜩 기증해야지.” 전시는 10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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