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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는 영화를 통해 늘 자신과 우리 모두의 치졸(稚拙)함을 드러낸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스스로 드러내게 만든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람들이 사랑한다는 것, 더 나아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두고 언쟁을 벌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다 점점 더 그의 영화에 대해 애기를 나누려 하지 않게 된다. 홀로 생각을 하려고 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렇게 점점 더 매니악(maniac)해진다. 홍상수가 하루가 갈수록 고독할 수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다.
홍상수가, 또 한편의 외로운 작업을 통해 이루어 낸 ‘빛나는’ 성과의 작품 ‘그 후’도 같은 범주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특징적이고, 결코 남이 따라 하지 못하는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가 줄을 잇는 것은 그가 늘 ‘간극’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장기 중 하나는 사랑과 사랑 사이의 예민한 부분을 너무 잘 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홍상수만큼 그걸 알기는 한다. 그러나 그만큼 표현을 해내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홍상수는 절대 상수다. 그 미세한 감정의 차이를 잘 알고, 또 너무 잘 그려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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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의 속 마음이 드러날 때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다. 예를 들어 그는 새벽에 (늘 그래 왔지만 이제는 그것도 의미가 없어진) 운동을 하는데 한참을 달리던 그는 간이 놀이터 앞에서 숨을 거칠게 내쉬며 한참을 꺽꺽 댄다. 힘겨운 것이다. 여자와 헤어져서 힘든 것이다. 여자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힘든 자신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지금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아무한테도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륜과 비밀의 사랑을 한 대가로 그는 스스로 외로움의 동굴에서 견뎌 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조금씩 조금 씩 드러나게 된다. 아내 해주(조윤희)가 남편을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뭔가를 간파한다. 쿡 찔러 본다. 하지만 아직은 설마 수준이다. 그러나 곧 봉완을 둘러싼 세 여자, 그러니까 아름과 창숙과 해주 사이에 사단(事端)이 나기 시작한다. 사랑은 균열을 일으킨다. 관계만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에 크레바스(crevasse)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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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간 즐겨 써 왔던 퀵 줌 인(quick zoom in) 기법이 현격하게 줄어 들고 있는 것도 이제 그가 세부적인, 심지어 아주 지엽 말단의 심리 묘사까지 충분히 자신 있어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모든 것은 홍상수가 점점 더 자연주의자가 돼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만든다. 자연주의는 ‘야비한 일상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일종의 사실주의를 말한다. 홍상수의 장기 중 하나 인 ‘술 상’ 신 이야말로 자연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술을 마시며 극중 인물들은 지나치게 저속하고, (특히 이 영화의 주인공 봉완처럼) 비겁하며, 위선적이다. 술 집 밖에서 그들은 안 그런 척 하고 살지만 결국 술이 본심을 드러내게 한다. 홍상수의 술은 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부른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밤이 해변에서 혼자’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그리고 ‘클레어의 카메라’와 ‘그 후’까지 홍상수는 요즘 이상하게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빨리 찍고 많이 찍는다. 그건 그가 뭔가를 목표로 했기 때문은 아닐 터이다. 할 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은 통으로 한 번에 얘기할 지 몰라도 홍상수로서는 그렇게 하는 한 세상 일, 사람 일을 설명하기란 요령부득이어서 그걸 하나씩 잘라서 말하는 것이 맞다 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이 많아지고, 작품이 많아지고,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홍상수의 어법은 늘 불편하다. 불쾌하기까지 하다. 이 영화 ‘그 후’는 그런 면에서 최고봉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자조적으로 남몰래 낄낄대는 짓도 그만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와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우리를 점점 더 완벽하게 쏙 빼어 닮기 시작한다. 그건 그가 점점 더 세상의 도를 체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를 기필코 보게 되는 것, 간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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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은 영화평론가 오동진과 함께합니다.
글을 쓴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상세하다 못해 깨알과 같은 컨텍스트(context) 비평을 꿈꿉니다. 그의 영화 얘기가 너무 자세해서 읽는 이들이 듣다 듣다 외치는 말, ‘닥쳐라! 영화평론’. 그 말은 오동진에게 오히려 칭찬의 글입니다. 윗글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닥쳐라!’ 댓글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