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진우기자] 새 정부가 소액 연체자들의 새출발을 돕는 차원에서 신용사면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나온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도덕적 해이를 불러온다는 둥, 그래도 해야 된다는 둥 논란이 있었지만 결론없이 수면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신문지면에서는 그 뉴스가 사라졌지만 시장은 적잖은 부작용을 앓고 있습니다. 경제부 이진우 기자가 '신용사면설'이 남긴 그늘의 한 부분을 전해드립니다.
사채업자 K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사채업자'라고 부르지만 실제 그가 하는 일은 사채업과는 좀 다릅니다.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빌려준 돈을 받는 게 그의 일입니다. 집으로 찾아가 가재도구를 집어 던지면서 '돈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그런 장면을 연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채무자 수천명의 데이터를 가져다 일일이 컴퓨터에 입력하고최고장을 보내고 전화도 하고 재산을 추적해서 압류도 하면서 빌려준 돈을 받아냅니다. 사무실도 꽤 크고 데리고 일하는 직원도 20명쯤 됩니다. K씨의 외모는 '돌쇠'보다는 '범생이'에 가깝고, 그의 책상에는 아령 대신 '채권분석실무' 따위의 전문서적들이 놓여 있습니다.
K씨의 주 고객은 은행이나 저축은행, 카드회사 등 금융기관입니다. 거기서 고객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못받은 채권뭉치를 '밭떼기로'(K씨의 표현입니다) 싸게 사옵니다. 받을 돈이 500억원이면 30~40억원 정도에 팔린다더군요.
모든 장사가 그렇듯이 괜찮은 물건을 싸게 잘 사오면 이문이 많이 남습니다. K씨가 그렇게 독촉을 하고도 못받은 '독한(?)' 채권뭉치들은 또 따로 분류되어 몇억원 또는 몇천만원에 다른 곳에 넘겨집니다.
법적으로는 이런 K씨가 운영하는 이런 회사를 '자산관리회사'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만, K씨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귀찮다며 누가 무슨 사업을 하냐고 물으면 그냥 '사채업자'라고 대답합니다.
요즘 K씨는 잠이 잘 안온다고 했습니다. 돈을 꾸준히 받아내야 직원들 월급도 주고 사무실 운영비도 내면서 회사가 돌아가는데, 채무자들이 돈을 갚는 비율이 작년 연말의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답니다.
"원래 1~2월은 연말에 돈쓰고 연초에 설이라고 또 돈쓰고 하느라고 사람들이 돈을 잘 못 갚아요. 그래서 이 바닥에서는 연말연시가 비수기이긴 한데요. 그래도 너무 심해요. 정부에서 신용사면하고 돈 대신 갚아준다고 하니까 다들 기다리는 거예요"
예전에는 돈 갚으라고 전화를 하면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사정하는 '눈물형'과 다시는 전화질 하지 말라고 고함치는 '맞짱형' 두 가지 타입의 고객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이명박 정부의 서민정책 방향이 어떻게 될 거 같냐'고 물으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신용사면 시나리오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100분 토론형'이 하나 더 생겼답니다.
'500만원 미만 소액채무자'가 대상이라는 보도가 신문에 나오면서 500만원 넘는 빚만 갚고 버티는 경우도 늘었구요. '나라에서 갚아 준다는데 거기가서 받으라'는 사람들도 꽤 많아졌답니다.
직원들은 '그게 확정된 것도 아니구요. 원금은 탕감이 안되구요' 하면서 설득을 해 보지만 '기왕 연체한 돈'이라고 생각하는 채무자들은 "일단 기다릴 거니까 당분간 전화하지 말라"고 콧대를 세운다고 하더군요.
K씨에게 '이명박 정부가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좀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신용사면을 해주거나 정부가 대신 갚아주거나 연체기록을 말소해 주거나 아무튼 다 좋습니다. 그게 필요하면 해야겠죠. 그렇지만 정부가 그냥 던지는 말 한마디에 시장은 요동을 치는데 '이런건 어떠냐'는 식으로 툭 던져버리고 말면 어쩌라는 겁니까"
정부가 배드뱅크를 만들어 소액 연체자들의 채무를 은행들에게서 사들이면 K씨의 일감은 많이 줄어들 겁니다. 적어도 그 바닥에 정부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생긴 셈이니까 싼값에 후려쳐서 '밭떼기'로 사오기는 좀 더 어려워지겠죠.
하지만 K씨의 불만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정책의 방향보다는 추진 과정이 문제라는 거죠. 자기 밥줄을 뺏기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겠지만 새겨 들을 부분도 있었습니다. 취지가 좋거나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서민들 빚이 좀 줄어들면 참 좋은 일이죠. 그렇지만 순서가 틀렸습니다. 그런 걸 하려면 미리 비밀리에 준비를 하고 일정을 확정해서 이렇게 한다고 딱 발표를 해야죠. 신용불량자 사면을 검토한다고 하는 건 마치 어느 지역에 신도시를 개발하려고 검토중이라고 발표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면 그 동네 땅값이 뛰고 난리가 나겠죠. 결국 신도시는 물건너가죠."
그는 답답하다는 듯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한마디 더 던지더군요. "취지는 좋지만, 그런 저런 사정들을 모르고 저런다면 무능한 사람들이고요. 혹시 알면서도 총선같은 목적 때문에 저러는 거라면 나쁜 사람들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