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순용 의학전문기자] 배변 후 휴지에 피가 묻어 나오면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치질’을 떠올립니다. 설사가 반복되거나 배변 습관이 달라져도 “요즘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가 보다. 뭘 잘못 먹었나?” 하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염증성장질환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이런 증상을 한참 참다가 뒤늦게 병원을 찾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늘 단순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특히 증상이 반복되거나 예전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면, 염증성장질환을 알리는 신호는 아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보라매병원 소화기내과 김광우 교수의 도움말로 염증성장질환에 대해 알아본다.
◇ 반복되는 장 증상, 그냥 넘겨도 될까요?
복통이나 설사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흔한 증상입니다. 상한 음식을 먹거나 감염성 장염에 걸렸을 때도 나타나고, 스트레스나 식습관 변화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증상이 쉽게 가라앉지 않거나 반복된다면 단순한 장염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염증성장질환은 어느 연령에서나 발생할 수 있지만, 특히 젊은 연령에서 복통과 설사가 지속되거나 체중 감소, 혈변 등이 동반된다면 염증성장질환(Inflammatory Bowel Disease, IBD)의 가능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염증성장질환은 장에 만성적인 염증이 생기는 질환군으로, 대표적으로 크론병과 궤양성 대장염이 있습니다. 두 질환 모두 호전과 악화를 반복할 수 있는 만성질환으로 꾸준한 치료와 관리가 필요하지만, 염증이 생기는 위치와 양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크론병은 입에서 항문까지 이어지는 소화관의 어느 부위에나 발생할 수 있으며, 염증이 장벽의 깊은 층까지 침범할 수 있습니다. 주로 소장 끝부분과 대장이 만나는 부위에서 많이 발견되지만, 환자마다 염증이 발생하는 위치와 범위가 다릅니다. 반면 궤양성 대장염은 기본적으로 대장 점막을 침범하며, 대개 직장에서 시작해 위쪽으로 연속적으로 퍼지는 특징을 보입니다.
◇ 염증성장질환을 의심해 볼 수 있는 ‘위험 신호’
염증성장질환의 대표적인 증상은 지속되거나 반복되는 설사와 복통입니다. 특히 궤양성 대장염에서는 혈변이 비교적 흔하게 나타나며, 크론병에서는 복통과 체중 감소, 항문 주위의 통증이나 분비물 등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피로감, 식욕 저하, 발열, 원인 모를 체중 감소가 나타날 수 있으며, 일부 환자에서는 관절 통증이나 피부 병변, 눈의 통증·충혈 등 장 이외의 부위에도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피가 섞인 설사가 하루 6회 이상 이어지면서 발열, 빠른 맥박, 빈혈 또는 염증 수치 상승 등 전신 이상이 동반되는 ‘급성 중증 궤양성 대장염(acute severe ulcerative colitis, ASUC)’은 입원 치료가 필요한 응급상황입니다. 이런 양상이라면 지체하지 말고 응급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다만 이러한 증상만으로 염증성 장질환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감염성 장염이나 과민성장증후군을 비롯한 여러 질환에서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증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증상의 지속·반복 양상과 체중 감소나 빈혈 같은 전신 변화, 항문 주위 병변, 가족력 등을 함께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최근 제가 공동 연구자로 참여한 국내 연구에서는 우리나라 환자의 특성을 반영해 크론병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보다 효율적으로 선별하기 위한 한국형 ‘위험 신호 지표(Red Flags Index)’가 개발·검증됐습니다. 이 지표는 크론병을 확진하는 검사가 아니라, 여러 증상과 임상 정보를 바탕으로 정밀검사가 필요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도구입니다. 흔한 장 증상 속에서 크론병의 가능성을 일찍 의심하고 적절한 진료로 연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 염증성장질환은 어떻게 진단할까요?
염증성장질환은 한 가지 검사만으로 진단할 수 없습니다. 환자의 증상과 경과, 과거력과 가족력을 확인하고 혈액검사와 대변검사를 통해 빈혈이나 염증, 감염 여부 등을 평가합니다.
이후 필요에 따라 대장내시경을 시행해 대장 점막을 관찰하고 조직검사를 진행합니다. 크론병이 의심되는 경우에는 회장 말단부까지 확인하며, 내시경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소장의 상태나 누공·농양 등 장 주변의 합병증을 살펴보기 위해 자기공명 소장조영술(MR enterography)이나 컴퓨터단층촬영(CT) 등의 영상검사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장초음파 (Intestinal ultrasound, IUS)도 염증성장질환의 진단을 돕고 경과를 관찰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도입되기 시작하였고, 저 역시 진료 현장에서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장초음파는 내시경에 따르는 장정결이나 불편감, 영상의학과에서 시행하는 검사들이 가지는 방사선 노출 없이 장벽의 두께와 혈류, 주변 조직의 변화를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다만 모든 검사에는 확인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가 있고 검사자의 숙련도도 중요하므로, 장초음파가 내시경이나 다른 영상검사를 일률적으로 대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환자의 증상과 질환 위치, 검사 목적에 따라 여러 검사 결과를 적절히 조합해 해석하는 전문적 판단이 중요합니다.
◇ 증상이 좋아졌다고 치료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염증성장질환은 환자가 느끼는 증상과 실제 장의 염증 정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증상이 좋아졌다고 해서 장의 염증까지 반드시 사라졌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치료 과정에서는 복통이나 설사의 호전뿐 아니라 혈액·대변검사, 내시경 또는 영상검사 등을 통해 실제 염증이 충분히 조절되고 있는지도 함께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근 진료지침 역시 증상만을 기준으로 치료 반응을 판단하기보다 객관적인 염증 지표를 함께 살피는 방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염증성장질환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유전적 요인과 면역 반응, 환경 요인, 장내 미생물 등이 복합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정 음식이나 스트레스 하나만으로 발생하는 질환은 아니며, 환자의 잘못된 생활 습관 때문에 생긴 병으로 보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 반복되는 장 증상, 조기에 진료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복되는 설사와 복통이 있다고 해서 모두 염증성장질환인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젊고 건강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이어지는 증상을 가볍게 넘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배변 습관의 변화가 지속되거나 복통과 설사가 반복되면서 체중 감소, 혈변, 발열, 항문 주위의 통증이나 분비물 등이 동반된다면, 가능하면 염증성장질환 진료 경험이 있는 소화기내과 전문의의 평가를 받아 원인을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크론병과 궤양성 대장염을 포함한 염증성장질환은 정확한 진단을 바탕으로 환자별 상태에 맞는 치료를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반복되는 장 증상을 단순한 장염으로 넘기지 말고 적절한 시기에 전문 진료를 받아 정확한 원인을 확인하는 것이 장 건강을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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