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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1912년 겨울 프랑스 파리의 빅토르마세 거리. 백발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두꺼운 외투에 단단히 지팡이를 짚은 채 거리를 더듬는 늙은 화가가 보인다. 도시재개발로 살던 집이 철거되자 일흔여덟 살 눈앞이 뿌연 그는 새 거처를 찾아 파리 시내를 헤매는 중이다. 그런데 어째 이 화가와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외면하고 있다.
에드가 드가(1834∼1917). 한때 ‘인상주의 그룹’에서 가장 중심에 섰고, 그들 사이에서 가장 빛나는 입담으로 주목받았고, 마네와 함께 루브르의 회랑을 거닐며 옛 거장들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인간관계를 절교로 끝맺는 사람이었다. 19세기 중후반을 살아내고 20세기에 들어섰을 때 그의 안부를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파리에는 드가의 고약한 성격을 알고 피하는 사람만 그득할 뿐이었다. 1917년 9월 그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도 몇몇에 불과했다.
마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과 차례로 등져
드가는 1874년 제1회로 출발한 ‘인상주의 전시’의 주요 멤버였다. 여덟 차례 이어간 전시 중 일곱 번 출품한, 사실상 그룹의 기둥인 화가였다. ‘인상주의 그룹’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살롱 전시를 거부하고 자발적인 전시를 추진한 화가집단을 말한다. 하지만 마네, 르누아르, 이어 ‘평생의 벗’이라 한 피사로까지, 드가는 함께 그림을 그리고 함께 살아온 동료들과 하나씩 절연했다. 도저히 곁에 머물 수 없게 만드는 괴팍스러운 성미도 큰 이유였지만 말년의 드가를 괴물처럼 만든 반유대주의 사상이 결정적이었다. 절친했던 이들과 후원자들을 거듭 내쳤던 것이다. 인상주의 그룹의 해체사는 사실상 드가의 절교 일지와 겹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가의 불화는 개인 간의 충돌에 머물지 않았다. 인상주의 그룹의 기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드가는 인상파라는 예술가의 공동체를 붕괴로 몰아간 장본인이기도 했다. 사건의 핵심은 전시에 누구를 참여시킬 것인가를 둘러싼 파벌의 문제였다. 인상주의란 명칭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던 드가는 뭐 하나라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당장 스스로 ‘독립화가’ 혹은 ‘사실주의자’로 불리길 원했고, 모네나 피사로가 추구하는 빛과 대기의 인상을 포착하는 방식을 저급한 감각의 유희쯤으로 여겼다. 제5회와 제6회 ‘인상주의 전시’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드가는 인상주의자들이 질색했던 아카데미풍 사실주의 화가들을 대거 끌어들이려 하기도 했다.
참다못한 카유보트는 1881년 당시 드가의 절친이던 피사로에게 분노에 찬 편지를 보냈다. 드가가 자신들의 전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며, 위대한 화가일지는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절대 함께할 수 없는 독선주의자이며, 모네마저 극도로 화가 나 참여를 거부했으니 이제 드가를 빼든지 우리가 나가든지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동료들의 강한 반발, 강력한 항의에도 드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타협하느니 차라리 고립되겠다”는 것이 대답이었다. 결국 모네, 르누아르, 카유보트 등 핵심 멤버가 전시를 보이콧하면서, 인상주의 그룹은 회복 불가능한 균열을 맞게 됐다.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동료를 대하는 드가의 방식은 개인에게도,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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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드가가 이런 비난에 동요했을까.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여인을 그렸을 뿐”이라며 관찰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몸을 씻는 여성을 훔쳐보는 듯한 관음적 시선으로 포착한 것이 자신의 목표임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평가는 다르다. 일상의 신체를 무방비한 순간에 포착하는 드가의 독특한 시선이야말로 고전적 누드, 그러니까 이상적으로 꾸민 몸의 전통을 과감히 해체한 것으로 다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훔쳐보기’가 남긴 의도하지 않은 진실
열쇠구멍으로 훔쳐본 여인. 그저 상상일 뿐이라고 드가는 말했지만 그 ‘훔쳐보기’가 의외의 진실을 남기기도 했다. 드가의 대표작으로 꼽는 ‘스타’(1876∼1877)는 화면의 중앙에 무대 조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빛나는 발레리나를 그리고 있다. 그 발레만이 ‘스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무대 뒤편에 반쯤 가려진 채 다리를 떡 벌리고 서 있는 검은 정장의 남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발레업계에서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연간 후원 회원에게 무대 뒤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줬다. 그 남성들이 후원이란 명분 아래 가난하고 어린 발레리나를 성적으로 착취한다는 공공연한 사실을 드가 역시 모를 리 없었다. 이 남성을 그림에서 지울 수도 있었지만 드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빛 속의 여성과 어둠 속의 남성을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드가는 자신이 그토록 집요하게 응시해 온 그 세계의 구조를 고스란히 남겨 놓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드가는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그 그림이 후대에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어둠 속 남성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이 곧 그가 그 세계를 고발하려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드가는 계급 간 불평등이나 사회정의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사실을 그대로 그리는 행위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진실이 화면에 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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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여성 화가 발라동 지지한 첫 남성 화가
그러니 드가가 당대 어떤 남성 화가보다 더 여성 화가들에게 실질적이고 결정적인 힘이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파리로 건너온 메리 커샛을 인상주의 그룹에 끌어들인 것이 드가였고, 모델 일을 하던 서커스단 출신 수잔 발라동의 엄청난 재능을 처음 발견하고 “우리와 동등하다”고 말한 것도 드가였다. 또 아무런 배경도 없는 여성 화가들의 미술계 등단을 돕고 자신이 가진 판화기술을 가르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가.
드가라는 인간의 모순이라고 해두자. 고집불통이고 독선적이며 편견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있었다. 예술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중요치 않았고, 자신의 눈에 훌륭하면 자신의 힘으로 밀어줬던 것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드가 앞에서는 단 하나 작품만으로 통과될 수도 있었다. 그 타협 없는 완강한 시선이 많은 여성 작가의 삶과 예술을 바꿨다. 모두와 관계가 끊긴 채 살던 드가의 마지막 해, 발라동만이 그를 보러 찾아왔다고 한다. 오래전 드가가 화가로 만들어줬던 그 발라동이다. 그 방문에 드가는 감사를 표했을까, 여전히 퉁명스러웠을까.
드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이해를 구하거나 후회하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결국 드가를 판단하는 일은 드가의 그림 앞에 선 각자에게 남겨진 몫이다. 끝내 그 의미조차 모르고 제작한 작품들이, 안목을 밀어붙여 무명의 여성 화가를 지지했던 일들이 이젠 ‘의도하지 않은 진실 드러내기’로 읽혀야 하지 않을까. 오래전 드가가 그림들 속에 남겼던 것처럼 말이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