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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앞이 꽉 막힌 것 같았다.”
여성 예술가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고모 나혜석(1896∼1948)이 살던 시대나 30년이 지나 그가 살던 시대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작품도 삶도 포기할 순 없었다.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재료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실험을 이어갔다. 한국미술사에 놓인 또 하나의 이름, 나희균(93)이다.
나희균은 1932년 만주 봉천(지금의 중국 선양)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경석은 일본 유학을 마친 뒤 만주에서 사업을 하던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여동생 나혜석이 일본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부친을 설득한 인물이기도 했다. 나희균은 그런 가풍 속에서 어려서부터 폭넓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여성이 공부한다는 것이 여전히 드문 시절에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가족을 따라 서울 종로구로 이주한 뒤 경기여학교에 진학한 나희균은 학교 미술반에서 서양화가 최덕휴(1922~1998)의 지도를 받으며 화가의 꿈을 키워갔다. 1950년 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곧 발발한 한국전쟁이 학업을 끊어놓았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한 뒤, 1952년 송도에 재건된 서울미대에서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었다. 1953년 환도 후 졸업장을 받았음에도 실제로 공부한 시간은 1년 반 남짓, 전쟁 속에서 겨우 이어간 대학과정은 만족을 주기엔 너무 짧았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이라는 이력도 생겼으나 공허했다.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지만 “내 길이 아니다”라는 확신이 들며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만다.
김환기·이응노보다 먼저 얼어젖힌 ‘파리시대’
1955년 나희균은 결단을 내렸다. 혼자서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환기, 이응노, 남관 등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 1세대’로 꼽히지만 그들보다 먼저 파리에 도착한 이는 나희균이었다.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기본기를 다진 뒤 에콜 드 보자르(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2년간 수학했다.
당시 파리 화단은 거친 느낌의 추상회화가 득세했지만 나희균의 눈길은 오히려 세잔과 피카소 같은 20세기 초 거장들에게로 향했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언어를 탐색했고 동시에 파리의 현장을 신문 지면을 통해 고국에 전하기도 했다. 파리 베네지트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것은 1957년이다. 당시 파리에서 자기 이름을 걸고 그림을 선보인 한국 여성화가는 거의 없었다. 전시장에는 낯선 땅에서 홀로 쌓아올린 치열한 흔적들이 걸려 있었다. 이듬해 그는 파리의 공기를 가득 안고 귀국했고, 바로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두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화가로서의 길은 밝게 빛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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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 나희균이 쓴 일기 같은 글에는 “조금만 머리를 쓰고 능률적으로 일하면 가정생활과 창작을 파탄 없이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보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 나혜석을 두고는 “시대의 희생자”라면서도 고모가 불행했던 이유를 “굳센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가정과 창작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절감하면서도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다짐이 그 냉정한 문장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던 끝에 드디어 나희균은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조금씩 작업한 결과물을 모아 세 번째 개인전(1970)에 내보였다. 무려 11년 만이었다. 긴 공백이 있었지만 그의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새로웠다. 무엇보다 시선을 끈 것은 네온관과 PVC파이프 같은 산업재료를 사용한 작품이었다(‘삼각의 네온’ 1970). 한국에 불던 건설 붐으로 자재가 산처럼 쌓이던 도시풍경에서 나희균은 “작품의 가능성”을 읽어냈다. 깨지기 쉬운 네온관을 전기와 결합해 빛의 선으로 만들고, PVC파이프를 일일이 절단해 배치했다. 이제껏 한국에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재료였고 파격적인 형식이었다. 전시장에서 네온이 깜박이며 그려낸 빛의 선은 낯설고도 압도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앞이 꽉 막힌 것 같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걸 해봐야겠다”던 결심은 이렇게 전혀 새로운 재료와 형식으로 돌파구를 냈다. 그의 생애, 아니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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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희균은 다루기 까다로운 네온 대신 철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를 담아내기에 더없이 적합한 재료였다. 철의 단단함은 그의 강인한 성정과도 닮아 있었다. 20여 년 동안 철판, 철파이프, 철선, 철못을 잇고 겹쳐내며 독창적인 조형세계를 만들어갔다.
나혜석 재조명도…혈연 의무 넘어 ‘앞선 여성미술가’로
나희균이 한창 작가로 기지개를 켜던 1970년대는 나혜석이 다시 주목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파격적인 삶과 불행한 말년 때문에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 속에 가려져 있던 인물, 나혜석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 무렵 나희균은 고모의 유작을 정리하고 작품의 진위 판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결혼 초기 고모에 대해 ‘의지가 부족했다’며 냉정하게 평가했던 나희균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증언자이자 옹호자로 나혜석의 편에 섰다. 시대를 앞선 여성예술가의 삶을 뒤늦게라도 기리는 작업은 혈연의 의무를 넘어 ‘여성미술가’로 살아온 자신의 자리와 무게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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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을 넘긴 지금까지도 붓을 놓지 않는 나희균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여성예술가가 감내해야 했던 고독과 인내, 성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주목을 받든 그러지
않든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남긴 결과물은 어떤 이름과 견줘도 뒤지지 않는 힘과 신선함을 지닌다. 미술사의 기록은 늘 주류를 좇았지만, 결국 그 미술사를 풍성하게 한 것은 올곧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예술가들이다. 나희균이란 이름을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이유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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