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진우기자] 23일 오전 한 삼성 임원의 소환을 앞두고 삼성 특검 사무실에 나온 기자들은 잠시 술렁거렸다. 소환 대상자가 거물급이어서가 아니었다. 삼성그룹 측이 '언론에서 좀 봐달라'는 이례적인 요청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실명을 쓰지 말고 사진도 모자이크 처리를 해달라는 게 삼성측 주문의 요지. 소환 대상자가 해외 영업을 담당하고 있어 경쟁사들이 그의 특검 소환 뉴스를 영업에 악용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날 오전 소환된 인물은 그래서 '윤모 부사장'이 됐다. 그는 공대를 졸업한 후 줄곧 영상 디스플레이부문에서만 일해온 정통 엔지니어다. 특검이 조사중인 비자금 의혹 계좌에 명의를 빌려준 것이 소환된 이유로 보인다.
기자들은 윤 부사장 소환에 앞서 잠시 회의를 열고 의견을 나눴지만 합의를 보지는 못했다. 상당수 언론사는 실명을 가려주는데 동의했지만 일부 언론사는 실명을 그대로 쓰겠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알 권리'와 '사적 이익 보호'를 놓고 기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 정도로 정리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삼성 비자금 사태'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상반된 시각을 반영하는 대목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론 삼성 비자금 의혹이 불거진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됐던, '삼성 특검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화두가 현장에서 실례로 표출된, 흥미로운 단면이기도 하다.
해외현장에서 뛰고 있어야 할 이런 중요한 인물을 특검이 왜 막 부르느냐는 목소리도 대뜸 나오겠지만, 그렇게 중요하다는 인물의 이름을 비자금용 차명계좌에 쓴 삼성의 부주의함으로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단순히 삼성의 해외 영업에는 지장을 주지 않게 하자는 취지이긴 하지만 논란이 확대되면 특검 조사를 전략적으로 가려서 하거나 신속히 끝내고 덮어야 되느냐, 아니면 해외영업통인 임원까지 비자금 조성에 활용하는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하느냐의 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기자실을 술렁이게 만들었던 '윤 모 부사장'은 언론사들의 결정을 기다리느라 당초 출두 예정시간보다 40분쯤 늦게 특검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40분의 시간은 기사를 어떻게 쓸지를 놓고 기자들끼리 잠시 고민한 시간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대한민국과 언론이 삼성 문제를 놓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지를 고심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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