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배장호기자] 코스피지수가 1600포인트를 넘었습니다. 증시 과열 경고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나오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수는 계속 "Go! Go!"를 외칩니다. 그런데 시가총액 비중이 한때 20%를 넘었던 한국의 대표기업 삼성전자 주가는 영 시원치 않습니다. 삼성전자 주가가 저런데도 주가가 계속 오르는 게 신기할 지경이지만, 한편으론 시장이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게 아닌가 하는 공포감도 느끼게 됩니다. 시장부 배장호 기자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누가 한국 주식시장의 미래를 묻거든 눈을 들어 삼성전자(005930)를 보게 하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구절이지만 사실 이런 구절은 `빗댄` 표현에 불과하지 실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최근 10여년간 한국 주식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해온 비중을 감안하면 차용된 이 문구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주식시장에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1~2년간 삼성전자의 주가 흐름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한국 주식시장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투자자 입장에선 오히려 `암울한 미래가 현실화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오히려 심란해질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요즘 국내 주식시장은 너무 잘 나갑니다. 꿈처럼 느껴지던 주가 1600포인트가 현실이 됐고, 올 연말까지 2000포인트를 돌파할 것이란 벅찬 전망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습니다.
한때 삼성전자가 오르면 전체 코스피 지수가 오르고, 삼성전자가 내리면 지수도 따라 내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 오래된 얘기도 아닙니다. 적어도 최근 10년간은 그래 왔으니까요. 당시 삼성전자란 존재는 한국 주식시장과 동의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삼성전자는 한국 주식시장에서 과연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결코 가볍게 접근할 질문이 아닙니다. 향후 한국 주식시장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화두`가 바로 이 질문이라고 기자는 생각합니다.
며칠 전 기자는 1조원이 넘는 국내 주식형펀드를 운용하는 한 자산운용사의 임원(CIO)으로부터 삼성전자에 관한 심각한 고민을 들었습니다.
"요즘처럼 펀드 운용하기 어려운 때는 없었다. 옛날엔 삼성전자 주식을 기본으로 깔고 난 후 추가 수익을 위해 다른 괜찮은 종목을 발굴하면 됐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기 힘들다."
어떤 펀드매니저는 이런 말도 하더군요. "만약 최근 2~3년 중 삼성전자를 쳐다보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펀드 성과를 냈을텐데, 삼성전자가 원망스럽다". 한국 주식시장의 간판 주식 삼성전자의 위상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도대체 삼성전자는 어쩌다가 펀드매니저들로부터 이런 홀대를 받는 처지가 됐을까요.
한달여 전 삼성그룹의 총수인 이건희 회장이 `5년내 위기론`을 언급하자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 회장이 말한 위기론의 주체는 한국 경제가 아닌 삼성전자를 가리킨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삼성전자가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여전히 절대적이란 점을 상기하면 `삼성전자 위기=한국경제 위기`로 봐도 틀린 말은 아니겠죠.
이 위기의 실체는 `기술기업의 성장 모멘텀 한계`에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 확장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대단합니다. 반도체 메모리 용량이 매년 두배씩 증가한다는 `황의 법칙`은 이러한 삼성전자의 기술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란데 있습니다. 애니콜 신화를 흔들었던 노키아와 모토롤라의 공세가 주는 교훈은 "기술 진보가 언제나 수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최근 몇년새 메모리 반도체 집적 능력은 수십 수백배 확장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모리 칩 가격이 수십 수백배 오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나은 제품이 나올수록 이전 제품의 가격 하락 속도는 더 빨랐습니다.
심지어 최근 방문한 중국에서 기자가 접한 소비자들도 이렇게 말하더군요. "핸드폰 그거 뭐 최신이라고 해봐야 별 소용 없더라. 지금 새 제품이라고 해봐야 그 다음 제품 나오면 이내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지더라. 핸드폰 카메라 화소가 100만 화소면 어떻고 200만 화소면 또 어떠냐. 그냥 통화만 잘 되면 되지.."
한때 우리나라에도 첨단제품만을 쫓아다니며 소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IT 후발 소비국인 중국의 소비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빨리 이런게 부질없단(?)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니 `첨단` 전략을 멈출 수 없는 삼성전자같은 IT기업들은 점점 더 벌어먹을 일이 막막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투자의 관점에서는 좀 다르게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그래도 현재의 삼성전자 주가는 싸다"라는 식의 논리죠. 이 논리대로라면 지금 삼성전자를 사는 것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속성상 성장성 프리미엄으로 평가받는 삼성전자 같은 IT기업이 성장 모멘텀에 한계를 느끼는 상황에서 가격 논리로 접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지금 펀드매니저들이 삼성전자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겁니다. 옛날같진 않지만 삼성전자는 여전히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고, 수익 창출력 대비 주가도 싼 편이지만 이것만으로 주식을 사기는 어렵다는 것이죠.
앞서 지적한 `기술기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방법으로 기자는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의 구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거 DOS에서 윈도로 컴퓨터 운영체제를 바꿔 새 버전을 출시할 때마다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확보해 온 `마이크로소프트`나, 미래 에너지 문제를 미리 예견하고 양산차보다는 하이브리드차나 수소차 개발에 박차를 가해 온 `도요타`와 같은 기업이야말로 스스로 성장 패러다임을 창출할 수 있는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지금의 삼성전자가 이들 기업처럼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기업인지 삼성전자 스스로가 고민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점점 한계산업으로 바뀌고 있는 IT산업 환경 하에서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 삼성전자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반도체 메모리 용량을 1기가 더 확장하고, LCD판넬 크기를 1센티미터 더 늘리는게 과연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
이미 투자자들은 삼성전자를 "한국 증시의 대표주식으로 봐야 할지, 그저 시가총액이 큰 주식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봐야 하는지" 냉정히 따지고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