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換亂10년)"위기의 전조”..한보 사태①

이종석 기자I 2007.12.03 16:35:15

무리한 금융대출로 쌓아올린 모래성
97년 대기업 연쇄부도 신호탄

[이데일리 이종석기자] 12월3일. 이 땅에 이른바 "IMF체제“가 시작된 지 꼭 10년째 되는 날이다. 10년전 이날 밤,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미셀 캉드쉬 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IMF 구제금융을 위한·정책이행각서‘에 서명했다. 이후 한국경제가 걸어온 10년은 고난과 극복의 가시밭길이었다. IMF 구제금융이 이루어지기 까지의 막전막후를 기록, 2005년 본지가 연재했던 ’한국경제 반세기‘ 시리즈 중 외환위기의 ’전조‘와 ’도래‘ 부분을 다시 엮어 올려본다. [편집자주]

97년 1월23일 오후 5시35분.
한보철강 채권금융기관회의가 소집된 제일은행 본점 회의실.

“정태수 총회장이 경영권 포기를 거부함에 따라 한보철강을 최종 부도처리키로 결정했습니다”
신광식 제일은행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보철강의 ‘부도’를 선언했다. 투자규모만 5조원대를 넘어서는 거함 한보철강이 마침내 침몰하는 순간이었다.

한보철강 부도는 한 재벌기업의 몰락 차원을 넘어 이후 국가경제 질서와 정치구도를 뒤흔드는 초대형 핵폭풍으로 비화됐고, 10개월여 뒤 결국 IMF사태를 불러오는 전조로 작용한다.

◇ 비운의 시작

“쇳가루를 만지면 흥합니다”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고로 불리는 한보 부도 사건의 서막은 어이없게도 한 역술가의 예언으로부터 시작된다.

85년 가을쯤. 종로5가 보령약국 뒷편에 위치한 B철학원에 중절모를 눌러쓴 건장한 체구의 사나이가 찾아들었다.
“새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가능성이 있습니까.” 사나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역술가는 이에 “흥한다”는 말로 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간단히 종료됐고 중절모의 사나이는 타고 왔던 검은색 벤츠에 몸을 싣고 사라졌다.

중절모의 사나이는 다름아닌 정태수 한보철강 회장이었다. 숱한 곡절을 겪으며 `자물쇠``오뚝이``불사신`으로 불렸던 정 회장이 과연 무슨 이유로 철학원을 찾은 것일까.

비운의 기업 한보철강의 탄생 비화는 여기서 부터 출발한다.
신규사업으로 철강업 진출을 검토하고 있던 정 회장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점술가에게 진단을 부탁했고, 긍정적인 답변에 만족했다. 운명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확신했던 정 회장에게 “흥한다”는 역술가의 점괘는 사업성공을 알리는 청신호나 다름없었다.

정 회장이 서울 북부세무서 주사를 끝으로 23년간의 세무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게 된 계기도 역술가의 조언 때문이었다.
“사업으로 대성할 운이니 당장 공무원 그만두고 흙(土)과 관련된 일을 하라”는 역술가의 조언에 힘입어 기업가로 변신한 정 회장은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가도를 달린다.

정 회장은 첫 사업으로 몰리브덴 광산을 개발해 사업기반을 다진데 이어 78년에는 당시 최대 규모인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4424세대를 분양,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흙과의 인연을 재확인했다.

◇ 아파트건설 부지로 인수한 철강공장이 모태

한보그룹이 철강사업에 진출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이처럼 일반적인 논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예측불허의 요인들이 군데군데 발견된다. 일단 시작부터가 무계획했다.

한보가 철강업계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84년 부산 사상구 구평동 해안가에 위치한 10만평 규모의 금호산업(철강업체)을 인수하면서 부터다.

당시 한보는 금호그룹으로부터 섬유 철강 등 2개 업종 중 하나를 골라서 인수할 수 있었으나 경기가 별로 좋지 않았던 철강 쪽을 선택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남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선택이었다.

당시 한보가 금호산업을 인수한 이유는 단지 구평동 공장땅이 아파트 건설부지로 적합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철강사업 보다는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지어 매각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한보가 금호산업을 인수하면서 부터 바닥세를 면치 못하던 철강경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건설경기 회복과 중국특수 등에 힘입어 국내외 수요가 살아나면서 철강업은 단기간에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알짜배기 사업으로 급부상했다.

아파트 건설 부지로 인수한 이 회사는 이후 한보철강으로 이름을 바꾸어 달면서 한보그룹의 주력기업으로 떠올랐고, 2년후인 86년에는 정 회장에게 5000만달러 수출탑을 안겨주는 영광을 선사한다.

정 회장은 이때부터 “철강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확신을 갖게 됐고, 제2차 철강사업 확장계획에 나선다. “쇳가루를 만지면 흥한다”는 역술가의 조언이 한 몫을 거든 것도 바로 이 때다.

철강사업 확장계획은 곧바로 구체화 됐다. 아산만 76만평을 매립해 세계 5위 규모의 초대형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야심찬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비운의 프로젝트 “당진제철소”의 탄생이다.

◇ 불안한 출발…부지매립 과정의 문제점

그러나 당진제철소는 출발과정에서 부터 문제를 안고 시작됐다. 기초적인 자금조달 계획은 물론 부지매립 과정이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는 8년후 닥쳐올 한보철강의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보가 매립면허를 받은 충남 당진군 송산면 고대리 앞바다는 당초 공유수면 매립 기본계획에 지정돼 있지 않은 땅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보측의 매립요청이 있은 직후인 89년 6월 경제장관회의를 거치면서 공유수면매립지로 전격 고시된다.

정부는 이미 80년대초 전국토에 대한 매립기본계획을 세우면서 당진제철소가 들어선 아산만 일대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대형선박이 드나들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매립지로 부적합하다는 결정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 같은 결정이 한보의 매립요청 이후 느닷없이 변경된 것이다.

문제는 또다른 곳에서도 제기됐다. 매립허가 과정에 일관성이 결여됐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아산만에는 삼성종합건설이 전기 전자 제지공장 부지로 매립요청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같은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보의 매립요청은 허가된 반면 삼성측 요청은 기각됐다. 당연히 특혜시비가 불거져 나왔다.

실제로 당시 동력자원부는 한보의 매립요청 지역이 한전의 가곡리 화력발전소 炭처리장과 중복된다는 점을 들어 당연히 반대의견을 개진해야 했음에도 “의견없음”이라는 이유로 공유수면 매립지 추가지정을 가능케 했다.

한전은 이 과정에서 한보측이 요청한 91만평 중 발전소 건립부지로 14만9천평을 양보받는데 만족했으며, 그나마 이 땅도 95년들어 한보측에 고스란히 넘겨줌으로써 두고두고 외압설에 시달리는 빌미를 제공한다.

또 해운항만청은 89년2월 발표한 의견서에서 “평택항으로 편입 운용될 지역”이라며 반대의사를 밝혔다가 3월21일 이를 특별한 이유없이 취하했고, 충청남도 역시 삼성종합건설이 신청한 B지구에 대해서만 정당한 사유없이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거의 같은 여건의 인접해역에 삼성과 한보가 부지매립을 신청했으나 삼성측 요청은 불허되고 한보의 요청에 대해서만 허락이 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매립허가를 둘러싼 특혜시비는 일과성 논란으로 끝나 버리고, 한보는 그해 12월 정부로부터 아산만 76만8천평에 대한 정식 매립면허를 취득하는데 성공한다.

한보철강은 이처럼 출발단계에서 부터 의혹과 베일에 가려진 의문의 기업이었다.

◇ 예고된 부도…자금조달의 허구성

매립 초기단계에 한보측이 제시한 자금조달 계획도 원천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정 회장은 91년 1월 가진 기자회견에서 “당진제철소에 소요되는 총 사업비 1조1786억원 가운데 4590억원을 주택사업, 유상증자, 사채발행 등을 통해 자체조달할 계획”이라며 “주택사업으로 개포, 수서지구 3천세대, 가양 등촌지구 4천세대 건립을 올해 시작하고 93년부터는 부산공장 이전에 따른 아파트 1만세대 건립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 회장이 주자금원으로 밝힌 수서지구 3천여세대 아파트 건립계획은 주택조합에 대한 서울시의 택지불법공급을 전제로 한 것으로, 후일 “수서사건”이라는 대형 부조리로 터져 나오면서 전면 백지화되고 만다. 정 회장은 이 사건으로 일생 세번의 구속 중 첫번째 구속의 테이프를 끊는다.

또 가양 등촌지구 역시 한보가 임직원 명의로 자연녹지 4만6천여평을 소유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법률상 한보에 대한 택지공급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판명된다. 높은 곳(?)으로 부터의 불법이 전제되지 않는 한 택지공급이 이루어질 수 없는 땅이었다.

결국 정 회장이 밝힌 4590억원의 자체 자금조달 계획은 애초부터 부정과 불법을 염두에 둔 무리한 발상이었으며 현실화되기 어려운 계획이었다.

이에 대해 한보여신을 담당했던 당시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한보그룹이 당진제철소 총사업비 1조1700억원 가운데 7130억원을 금융기관에서 차입하고 나머지 4600억원을 자체조달하겠다는 내용의 1차 사업계획서를 제출했었다”며 “자료분석 결과 소요자금중 90% 가량을 은행빚으로 조달할 속셈이었던 것으로 판명돼 자금지원을 거절한 바 있다”고 밝혔다.

“사업은 99%가 운”이라는 정 회장의 평소 지론처럼 투자규모 5조원대에 달하는 한보철강 `당진제철소`의 신기루는 이렇게 무계획과 불법의 소지를 안고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보철강 부도는 이미 시작단계에서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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