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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동산’은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그의 유작입니다. 원작은 경매 위기에 처한 벚꽃 동산을 통해 몰락해가는 귀족의 이야기를 그렸는데요.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원작을 2024년 한국을 배경으로 새롭게 각색했습니다.
스톤 연출은 개막 전 제작발표회에서 한국을 배경으로 각색한 이유로 “급변하는 사회”를 꼽았습니다. 그는 “‘벚꽃동산’은 과거와 전통,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기에 급변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삼아야 했다”며 “멜랑콜리와 희망을 오가는데 있어 한국이 적합했다”고 말했습니다.
공연을 관람한 뒤 스톤 연출이 제작발표회 때 보여준 자신감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외국 연출가가 각색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K패치’를 보여줍니다. 스톤 연출은 올해 1월 한국을 방문해 배우들과 1주일 동안 워크숍을 진행하며 캐릭터 설정 및 각색 방향을 정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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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내내 웃음을 멈출 수 없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그런데 공연을 다 보고 난 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알던 ‘벚꽃동산’이 이런 작품이었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침 지난해 5월 국립극단이 김광보 연출로 선보였던 ‘벚꽃동산’이 떠올랐습니다. (참고로 이 ‘벚꽃동산’은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을 통해 감상할 수 있습니다.)
국립극단 ‘벚꽃동산’은 블랙 코미디보다 아련한 비극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늙은 하인 피르스가 맨 마지막에 내뱉는 대사,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아. 아무것도 없군”이 마음에 깊이 남았었죠. 인생이 허무함이 짙게 묻어났던 대사였죠. 얼마 전 인터뷰로 만난 전도연도 처음 원작을 읽었을 때 피르스의 마지막 대사가 인상적이었는데, 스톤 연출이 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 놀랐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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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연출이 각색한 ‘벚꽃동산’은 러시아 고전을 호주의 연출가가 한국적인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동시대 관객과 소통에도 성공했고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점도 없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정부 주도로 압축 성장을 이뤄낸 한국 사회의 단면을 ‘재벌’로 다룬 것은 흥미롭지만, 자수성가한 신흥 자본가가 몰락해가는 재벌을 사들인다는 설정은 역동적인 한국 사회에 대한 다소 납작한 해석 같기도 했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프로그램북에 실린 스톤 연출의 인터뷰 중 인상 깊은 구절로 이 글을 끝맺을까 합니다. “나는 관객 전체가 동일한 생각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질문들을 제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첫 걸음이 관객들에게서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가 옳고 그른지, 선하고 악한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벚꽃동산’은 오는 7월 7일까지 공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