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뉴스속보팀]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지닌 교황 바오로 6세와 중미 엘살바도르의 우파 군사독재에 항거하다 미사 집전 도중 암살당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가톨릭 성인 반열에 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4일 오전(현지시간)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시성 미사를 집전하고, 이들을 비롯한 7명을 가톨릭의 새로운 성인으로 선포했다.
교황이 교황 바오로 6세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등을 호명하며, 이들을 성인으로 추대한다고 밝히자 현장에 모인 약 7만 명의 군중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미사에서 로메로 대주교가 1980년에 엘살바도르에서 살해될 당시 차고 있던 피 묻은 벨트를 매고, 교황 바오로 6세가 쓰던 성배와 목장(牧杖·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을 사용하는 등 두 사람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드러냈다.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와 교황 바오로 6세가 20세기의 혼란스럽던 시절에 큰 용기를 가지고 사회적 정의와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고 평가하며, 이들에게 평소 깊은 존경심을 표현해온 바 있다.
교황은 이날 미사 강론에서는 교황 바오로 6세를 “빈자들을 돌보는 쪽으로 교회의 방향을 외부로 향하게 한 ‘선지자’”로, 로메로 대주교는 “빈자와 자신의 교구민들에게 가까이 머물기 위해 자신의 안전과 목숨까지도 포기한 성직자”로 평가했다.
즉위 이후 ‘가난한 자를 위한 가난한 교회’를 표방해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어 “재산을 비롯해 모든 것을 포기한 두 사람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진정으로 신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며 교회가 빈자들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입장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교황은 “돈에 대한 사랑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돈이 중심에 있는 곳에서는 신과 인간을 위한 자리가 없다”고도 덧붙였다.
격동기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이끈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 바오로 6세(재위 기간 1963∼1978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재개함으로써 모국어 미사 전면 허용 등 가톨릭 교단의 광범위한 개혁을 완수한 교황으로 널리 기억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한국과도 각별한 인연을 지니고 있는 교황이기도 하다.
해방 후 정부를 수립한 한국이 1949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를 앞두고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고자 노력할 당시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황청 국무원장 서리로 재직하며 각국 대표와 막후교섭을 통해 장면 박사가 이끈 한국 대표단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신생국인 한국이 유엔의 승인을 받아 국제 사회의 공식 일원으로 자리매김한 것에는 당시 주프랑스 교황청 대사로, 훗날 교황 요한 23세로 즉위한 론칼리 대주교와 교황 바오로 6세의 이 같은 노력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 외교가의 평가다.
1969년 3월 김수환 추기경을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전격 서임한 것도 교황 바오로 6세였다.
교회 상설기구 겸 교황의 자문기구로 전 세계 주교 대표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설립한 주인공이기도 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시성식은 공교롭게도 이 회의 기간과 맞물렸다.
지난 3일 개막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명한 대의원 자격으로 참여 중인 유흥식 주교(대전교구장)는 “바오로 6세는 한국에는 ‘은인’이나 다름없다”며 “비단 한국 가톨릭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준 교황 바오로 6세가 성인으로 추대되는 것은 한국으로서도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말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또한 역대 교황 가운데 최초로 정교회 등 기독교 다른 종파의 지도자를 만나 교회의 일치를 모색하고, 평신도와 만나는 일반 알현을 처음 도입하는 등 교회내 평신도 역할 확대를 도모한 최초의 교황이기도 하다.
재임 시 6대륙을 모두 방문하는 등 선교와 외교 면에서도 교황의 지평을 확대하고, 호화로운 보석이 장식된 교황관을 쓰길 거부하고 교황관을 매각해 그 돈을 빈민 구호에 쓰도록 하는 등 빈자들에게 눈길을 돌린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바오로 6세는 그러나 재위 당시 낙태와 인공 피임을 금지하는 가톨릭의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논란을 빚기도 했다. 여성 해방운동과 민권 운동이 봇물이 터진 1960년대의 서구 사회에서 상당수의 신자들은 이런 교황청의 결정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부르며,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졌다.
바오로 6세가 성인 반열에 오름에 따라 가톨릭에서는 교황 요한 23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 20세기에 재위한 교황 총 3명이 성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로메로 대주교는 1970년대 후반 엘살바도르에서 우파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사회적 약자 보호와 정의 구현에 앞장서다 1980년 3월에 미사 집전 도중 암살당한 지 38년 만에 가톨릭 성인 지위에 오른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는 로메로 대주교의 암살 이후에도 1992년까지 내전의 혼란이 계속되며 총 7만5천 명이 목숨을 잃는 참극이 벌어졌다.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해방신학’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은 한편으로는 가톨릭 보수파와 엘살바도르 우파의 반발을 샀다.
하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3월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 계획을 발표하면서 “독재 정권의 억압에 맞서 가난한 사람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 편에 섰던 성직자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모델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로메로 대주교가 성인으로 추대되는 순간을 보기 위해 이날 교황청에는 산체스 세렌 대통령을 비롯해 알살바도르인 5천여 명이 운집했다.
로메로 대주교의 유해가 안치된 산살바도르 대성당 주변과 로메로 대주교가 마지막 미사를 집전하다 암살된 산살바도르의 병원 주변에도 수만 명의 시민이 밤을 꼬박 지새운 채 대형 TV를 통해 시성식 모습을 지켜보며 감회에 젖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시성식에서 19세기의 독일 수녀 마리아 카테리나 카스퍼 등 다른 5명도 함께 성인으로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