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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김진경 靑비서관 `신의 숨결`

김윤경 기자I 2005.07.13 17:30:35
[edaily 김윤경기자] 다음은 김진경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이 청와대 소식지 `청와대 브리핑`에서 `미래로부터의 통신-신의 숨결`이라는 글 원문이다. <원문> 추수가 막 끝난 들판에서 과부와 고아들이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었다. 그 밭의 주인이 와서 과부와 고아들이 주운 이삭을 빼앗았다. 자기 밭에 떨어진 이삭이니 자기 것인데 왜 함부로 줍느냐는 것이었다. 이때 한 선지자가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와 부자를 크게 꾸짖었다. “네가 이 밭의 주인이라 해도 한번 땅에 떨어진 이삭은 줍지 마라. 그 이삭은 너의 것이 아니라 신의 창고에 속한 것이다. 그 이삭은 과부와 고아를 먹이기 위해서 신이 마련한 것이니 과부와 고아들이 주울 수 있도록 놓아두어라. 그 이삭은 신의 숨결이다. 신에게 속한 것을 신의 창고에서 함부로 훔쳐내지 마라.”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원리를 간명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물론 경제적 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적 부만 있다고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것은 `신의 숨결` 즉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적 배려`다. `사회적 배려`와 `경제적 부`가 상호 보완 상승작용을 하는 사회는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사회적 배려`에 의해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 역량이 최대화되면 그 공동체의 경제적 부도 증가하고, 경제적 부가 증가하면 더 많은 배려가 가능한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회적 배려`와 `경제적 부`가 서로 대립하는 사회는 후퇴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배려`의 결핍은 공동체 구성원 역량의 축소를 낳고, 공동체 구성원 역량의 축소는 경제적 부의 축소와 사회적 배려의 더 심한 결핍을 낳는 식으로 말이다. 논술반영 60%에 맞는 채점신뢰도는?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떤 유형에 속할까? 최근 2008년 서울대 입시전형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사회가 후자의 유형에 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초등 여교사 에스텔 모리스를 교육능력부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에스텔 모리스 교육능력부 장관은 많은 업적과 신화를 남겼지만, 2년 만에 교육부장관직을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능 논술문제의 채점 신뢰도에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채점위원에 따라 똑같은 답안이 10점 이상의 차이가 났다. 우리나라에서도 1987-88년에 대학별 논술이 있었다. 그 반영비율은 불과 10%였는데 문제의 타당도와 채점의 신뢰도에 문제가 제기되어 2년 만에 폐지되었다. 서울대가 논술의 대입 반영비율을 60%로 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60%의 압도적 반영비율에 합당한 논술의 `채점 신뢰도`를 한 개 대학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 정밀한 채점기준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며, 그 정밀성을 감당할 채점자는 또 어떻게 준비시킬 것인가? 한 개 대학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총역량을 기울여도 2008년까지 50-60%의 대입 반영률에 합당한 논술의 채점 신뢰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2008년에 실제로 50-60%의 반영비율을 갖는 대입논술이 치러진다면 대학은 줄 소송에 휘말리고, 최악의 경우 그해 대학 입학생을 못 뽑을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교육열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사태이며, 방치하기에는 너무도 심각한 사회적 혼란이다. 이러한 문제가 충분히 예상된다면 정부가 대학에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근 서울대 교수협의회와 평의원회는 이 당연한 시정요구에 대해 `대학자율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고 엄중 항의해왔다. 반영률 60%의 논술이 몰고 올 사회적 혼란은 차치하고라도 대학입시가 과연 전적인 대학의 자율 영역인가? 초중등교육은 대체로 `사회적 배려`의 원리가 우세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국가의 관여 폭이 큰 영역이고, 대학은 시장의 원리가 우세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율성이 주어지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초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의 접점인 대학입시는 어떠해야 하는가? 학교·학생에 대한 `점수 서열화` 극복해야 유럽의 경우는 대학학생 선발을 국가가 관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은 대학입학정원중앙관리소가, 영국은 대학선발관리기구가 일괄적으로 대학학생 선발을 관리한다. 미국 역시 선발 주체는 대학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유럽과 유사하게 학교생활기록, 국가기준 평가를 바탕으로 학생을 뽑는다. 서구의 경우 대체로 대학학생 선발은 국가의 관여가 큰 폭에서 필요한 영역으로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대학학생 선발이 초중등교육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전체 사회의 고급 역량 형성에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면 대학학생 선발이 대학의 전적인 자율 영역이라는 주장은 별 근거가 없다. 과거 100년 이상 일본과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교육원리는 `서구지식을 빨리 빨리 받아들여 될 수 있으면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주입 암기케 함으로써 하루라도 빨리 서구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서구에서 수입된 지식을 얼마나 암기 습득했는가를 단순 점수화하는 시험이 학교교육을 지배했고, 서구지식 수입의 주요 통로인 국가와 대학이 그 평가의 궁극적 주체였다. 이렇게 해서 국가고사와 대학별 본고사가 대종을 이루는 대학학생선발제도가 우리나라와 일본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별 본고사는 `서구지식 수입형` 교육체제의 유물인 셈이다. 이제 학교와 학생을 단순 점수로 서열화하는 이 서구지식 수입형 교육체제는 극복되어야 할 시점에 왔다. 그러지 않으면 지식기반사회에서 생존 자체가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식자층들은 서구지식 수입형 교육체제의 유물인 대학별 본고사를 여전히 요구하고, 그것을 대학자율로 강변한다. 왜 우리사회의 최고 식자층이 그렇게 계속해서 학생들을 획일적 점수로 줄 세우고 싶어할까? 서구지식 수입형 교육체제에서 얻은 기득권을 학력세습을 통해 물려주고 싶은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유수대학은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자란 중상층 아이들로만 너무 많이 채워져 있다. 미국 연방법원은 한 백인 학생이 미시건 대학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사람은 이질적 문화와 부딪칠 때 가장 많이 배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의 학습 집단은 다양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입에서 소수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준 미시건 대학의 행위는 정당하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렸다. 생물에게 있어 동종교배의 반복은 그 생물종의 몰락을 가져온다. 이것은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진리일 것이다. 너무 많은 욕심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신의 숨결을 죽일 수도 있다. 신에게 속한 것을 신의 창고에서 함부로 훔쳐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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