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생각]①외세의 침략이 키운 '최강 로마군단'

이성웅 기자I 2020.11.09 11:00:00

지상 강의: ‘WarStrategy’ 5강 절대강자 로마군단의 비밀
약소 도시국가서 시작, 외세 침략에 대항하며 성장
켈트족 침략 이후 국민 통합하고 군대 개편
로마식 '레기온' 편제로 중대단위 자율 전술 강조
막강한 동맹의 힘과 원로원 지혜로 대제국 건설

◇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역임. 육군 및 해군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워-스트래티지’ 5강 ‘절대강자 로마군단의 비밀’ 편을 강의하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이성웅 기자] 기원전(BC) 323년 유럽 최초로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이 급사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가 세웠던 헬라 제국은 네 조각으로 쪼개진다. 알렉산더 대왕이 더 오래 살았다면 이탈리아 지역까지 정복했을까는 역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인들의 숙원인 페르시아 원정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그리스 서쪽에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까지는 세력을 미치지 못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이탈리아 지역을 통일한 로마는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이라크, 북쪽으로 라인강 지역, 남쪽으로 북아프리카까지 500만㎢에 달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렇다면 로마가 고대에서 중세까지 대제국을 영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위대한 생각’ ‘워-스트래티지’ 5강에서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로마군단이었다”고 운을 뗐다.

◇위기를 기회로…군단 체제로 변화

로마는 이탈리아 서쪽 테베레강 연안에 터를 잡은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했다. 강을 낀 지역이었지만, 국력이 강한 국가는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저서 ‘영웅전’에서 로마인에 대해 “지성으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으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며,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선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로마인도 알고 있었다”고 서술했을 정도다.

켈트족에 의해 침략당한 로마를 묘사한 근대화가 폴 자민의 작품
실제로 로마는 BC 390년 켈트족이 침략했을 때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했다.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한지 불과 100여년만의 위기였다. 알리아 전투에서 참패한 로마는 카피톨리아 성전에서 7개월간 항전했지만, 그 기간 동안 켈트족은 로마인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살육했다. 켈트족은 황금 300㎏을 받고 나서야 로마에서 물러났다.

최 교수는 “켈트족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는 로마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며 “켈트족 침략 이전 분열됐던 로마 시민들은 전쟁 이후 대통합하고 새로운 국가발전 전략을 모색했다“고 설명했다. 로마의 대전략은 동맹을 강화하고 뛰어난 전투력의 군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로마는 주변 동맹국들과 실효성 있는 공동안보체제를 만든 직후 군대 체제 개편을 단행했다.

로마는 켈트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기동력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기존 그리스식 ‘팔랑크스’(Phalanx) 체제를 버리고 1명의 집정관이 2개의 군단을 거느리고 기병과 동맹군단을 배치하는 ‘레기온’(Legion) 체제를 채택했다. 2개 군단의 양 옆엔 비슷한 규모의 동맹군 ‘알라’(Ala)를, 각 동맹군의 옆엔 300명 규모의 기병대 ‘카발리’(Cavalry)를 배치했다.

로마군단의 핵심 전술 단위는 중대였다. 1개 군단이 약 5000명 규모로, 각 군단은 120명으로 구성된 보병중대 ‘마니플’(Maniple)로 채워진다. 단위 중대가 자율적·독립적으로 전술을 펼칠 수 있도록 편제를 짰다. 이 같은 로마군단의 편제는 현대의 군에서도 여전히 일부 사용하고 있다.

로마군단 편제
편제 변화뿐만 아니라 개별 전사의 전투력 양성도 군대 개편의 핵심 과제였다. 로마군은 30㎏ 완전군장 상태에서 18마일(약 29㎞)를 주파하는 훈련으로 기동력을 키웠다. 또 각종 토목기술을 배워 행군 중 주거지를 마련하도록 하는 등 어떤 상황에서도 싸울 수 있는 부대로 양성했다. 상명하복의 엄격한 규율도 중요시했다. 사소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중대의 백인대장이 채찍으로 처벌했다. 가장 큰 형벌은 ‘데시메이션’(Decimation)이었다. 데시메이션은 겁쟁이에게 내린 벌로, 전투에서 퇴각할 경우 부대원 중 무작위로 10분의 1을 뽑아 나머지 9할의 병사들이 때려죽이도록 하는 형벌이다.

최 교수는 “당시 로마군단은 어느 나라보다 전투력이 뛰어난 절대강자였다”며 “시민 전사였던 이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스스로 지키는 것에 대한 명예와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전했다.

로마는 국가 차원에서 우수한 무장과 장비를 보급했다. 원래 로마군은 시민군이기 때문에 무장을 자체 수급하는 것이 당연시 됐지만, 무장을 통일하기 위해 국가에서 장비를 나눠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 방위적 노력으로 얻어진 탁월한 전투력을 기반으로 로마는 켈트족 침략 이후 120년 만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게 된다.

◇세계 민주주의 기틀 된 로마 공화정

로마의 또 다른 강점은 정치체제였다. 세계 민주주의에 막대한 영향을 준 로마의 공화정은 켈트족 침략 이후 국민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평민 출신 호민관을 집정관에 배정한다는 ‘리키니우스법’이 통과된 것을 기념하는 ‘화합의 사원’(Temple of Concordia) 복원도.
로마는 BC 509년 공화정 체제를 도입한 이후 귀족과 평민간의 치열한 계급투쟁이 이어졌다. 로마 공화정은 이 뿌리 깊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원전 495년 평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호민관’을 설치했다. 평민이 실질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켈트족 침략 이후에는 평민의 정치 참여 기회가 더욱 확대됐다. 평민도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됐고, 평민 출신 호민관이 집정관에 오를 수 있었다. 또 평민회의의 결정이 입법으로 이어져 사실상 귀족과 평민 간 정치적 평등이 실현됐다.

평민의 정치 참여는 군대에도 적용됐다. 로마 군단을 지휘하는 집정관의 임기는 1년이었다. 이들은 ‘켄투리아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되었는데, 집정관이 지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장에서 목숨이 오갔기 때문에 군사적 역량이 가장 중요시됐다.

집정관을 뽑는 주체는 집정관의 지휘를 받는 백인대장들이었다. 또한 백인대장을 뽑는 것은 백인대장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이었다. 사실상 말단 병사들이 최고 지휘관인 집정관을 뽑는 셈이다. 이러한 민주적 제도 덕분에 로마에서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 가이우스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 등 유능한 지휘관을 계속 배출할 수 있었다.

최 교수는 “로마는 전쟁을 계속했기 때문에 오히려 국민을 통합할 수 있었다”며 “전쟁을 수행하는 평민의 발언권이 확대됐고, 평민의 요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개방적 정치체제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가이우스 줄리어스 시저.
◇원로원을 통한 통합의 대전략

로마가 이탈리아 통일을 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적은 줄이고 친구는 늘리는 로마의 ‘로마화 전략’이 있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국가에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고, 관계가 좋지 않은 국가에도 투표권을 제외한 시민권을 줬다. 동맹국에는 전쟁 발생 시 로마 군대의 자동 파견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또한 전략적 거점지는 식민지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차등을 두었으며 동맹국들 사이에는 식민지나 병합지를 두어 동맹국끼리의 단합이나 독립적 활동을 막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로마 동맹의 힘은 실로 강대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연패했지만,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맹의 힘으로 20개 군단, 18만 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니발의 군사는 겨우 2만5000명 정도였다.

이 같은 동맹 체제를 만들 수 있는 지혜는 300명의 원로들로부터 나왔다. 로마의 원로원은 전직관리나 집정관, 법무관들로 구성됐다. 이들이 국정에 조언하고 실질적인 인사권을 행사했다. 원로원이라는 이름 때문에 구성원의 나이가 상당히 많고 보수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21대 국회의원의 평균나이인 54.9세보다 젊고 개방적으로 운영됐다.

최 교수는 “로마는 원로원 일당 지배체제였지만 폐쇄적이지 않았고 새로이 통합된 지역의 원로를 받아들일 정도로 개방적이었다”며 “이들은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할 시기에 지혜를 제공했고, 이는 로마의 대전략을 세우고 실현하는 토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원로원에서 대전략 차원의 지침을 내리면 유능한 지휘관이 군대를 운영해 승리를 쟁취했으며, 이 지휘를 시민 전사들이 충실하게 수행했다”며 “명예와 헌신을 중시하는 시민적 기풍과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상호작용하면서 로마를 대제국으로 이끌었다”고 덧붙였다.

◇‘위대한 생각’은…

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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