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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aily리포트) `5%룰`과 `결혼 계획서`

이진우 기자I 2005.04.11 18:05:53
[edaily 이진우기자] "5%룰"이라는 제도로 요즘 증권시장이 시끄럽습니다. 이 제도를 도입한 감독당국도 며칠째 속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별 특별한 제도도 아닌데, 그걸 좀 제대로 하자고 했다가 한 외국신문에게 "정신분열증적"이라는 비난까지 들었으니 속이 쓰릴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지켜본 증권부 이진우 기자는 감독당국의 준비미흡과 안일한 대응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들은 우스개소리를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농구감독이 게임이 풀리지 않자 작전타임을 부른 후에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가만히 보니까 우리가 지금 안되는 게 딱 세가지가 있다. 첫째가 공격, 둘째는 수비, 세째는 공수전환이다. 다시 들어가서 이거 세 가지만 신경써서 열심히 해라" 저는 요즘 5%룰을 둘러싼 소동을 보면서 주식시장의 감독역할을 맡은 금감원과 이 농구감독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걸 느꼈습니다. 작전타임이라는 게 꼭 뭔가 알려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한 경우도 있으니까 이런 작전지시를 내린 농구감독을 무조건 비웃기는 어렵겠지만,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는 제도를 시장에 내놓고 "어떻게든 잘 해보라"고만 소리치는 금감원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낙제점입니다. 덕분에 시장 분위기는 상당히 "혼란스럽게" 바뀌었습니다. 주식시장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은 "5%룰"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더라도 다들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줄로 압니다. 5%룰은 아주 간단합니다. 어떤 종목이든 주식을 5% 이상 가진 주주는 어떤 돈으로 샀고, 왜 샀는지를 공시하도록 한 규정입니다. 남이 무슨 돈으로 주식을 사든, 왜 사든 무슨 참견이냐 싶기도 하겠지만 14년전부터 증권거래법에 들어 있던 규칙입니다. 굳이 그런 법을 만든 이유를 대자면 개인의 사생활을 다소 침해하더라도 경영을 하고 있는 기존 대주주나 다른 투자자들에게 지분율의 변화와 관련한 사항을 공시로 알려주는 것이 보다 공정한 게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겠죠. "알고보니 다른 선진국들도 다 한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겠구요. 지난 91년부터 증권거래법에 들어있던 이 규정을 올해 좀 손질을 하면서 예상치 못한 소동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매입목적과 자금출처를 "구체적으로 밝히라"는 게 새 5%룰의 요점인데요 어디까지 밝혀야 구체적인 건 지에 대해서는 "아무튼 구체적으로 밝히라"며 입을 닫아버렸으니 여전히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가 된겁니다. 일단 "주식을 왜 샀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과거에는 "투자목적" 또는 "경영참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쓰면 됐습니다. 그러나 바뀐 5%룰은 투자목적인 경우 "경영참여를 않겠다"는 약속을 곁들이도록 했고, 경영참여가 목적인 경우는 도대체 어디까지 참여하려고 하는지 10개의 구체적인 질문에 "예"나 "아니오"로 대답하도록 했습니다. 참 까다롭고 꽤 완벽해보이지만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전국의 모든 총각들은 맘에 드는 처녀와 만나기 시작한 지 한달이 지나면(5% 이상 사들이면) 결혼까지 할 계획이 있는건지 아니면 그냥 친구로만 만날 건지(경영참여 목적인지 단순투자인지) 확실히 밝히라는 건 과년한 딸을 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참 좋은 제도지만 총각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헷갈리는 규정 아니겠습니까? 주식은 기본적으로 투자목적과 경영참여목적을 함께 갖고 있는 금융상품입니다. 소액투자자도 아니고 5% 이상의 지분을 가진 투자자가 그 회사의 경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밝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죠. 지난 2일까지 1500개가 넘는 상장기업들의 5% 이상 주주들이 경영참여 또는 단순투자로 투자목적을 밝혔지만 이건 "지금 당장만 보면 그렇다는 뜻이고 앞으로는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다"는 전제조건을 모두들 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존 경영진의 경영권 보호를 목적으로 도입된 5%룰이 "정신분열증적"이라는 비난을 들을 만큼 형식적으로는 더 강화됐지만 실제로는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 어떤 회사의 대주주도 5%넘는 지분을 가진 다른 주주가 "단순투자"라고 밝혔다고 마음을 푹 놓거나 "경영참여"라고 밝혔다고 해서 갑자기 더 긴장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죠. 새로운 규칙을 도입할 때는 반드시 시장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인식하고, 불편함보다는 이로움이 많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 그래도 불편함을 최소화할 방법을 찾아서 조심스럽게 시장에 내놔야 합니다. 이 제도가 시장에 왜 필요한지, 어떤 점이 좋아지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다보니 5%룰이 정신분열증적인 제도라는 외국 신문의 비난에 대해 "다른 외국도 다 하는데 왜 우리만 뭐라고 하냐"는 식의 수준낮은 대응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어떤 돈으로 주식을 샀는지 자금출처를 밝히는 부분에 가서는 우리 주식시장의 "감독님" 격인 금감원의 애매모호함이 극에 달합니다. 수천억원대의 주식 가진 재벌2세들이 "근로소득 등"으로 주식을 샀다고 신고해서 물의를 빚고 있지만 금감원은 여전히 명확한 신고 기준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금감원은 재벌2세들의 허위신고 파문이 커지자 상장기업들에게 구체적으로 사례까지 제시하면서 안내문을 보냈습니다. 사업소득, 배당소득, 근로소득 등으로 나눠서 자금원천을 구체적으로 기재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꼭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건지 이 기준에 미달하면 안된다는 건지에 대해서는 역시 그 특유의 애매함으로 말을 흐렸습니다. "예전보다 구체적으로 밝히라"는 게 개정된 5%룰인데 얼마나 구체적으로 밝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겠다"는 식입니다. 금감원 관계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죠. "우리가 그런 안내문을 보낸 것은 자금출처를 밝히는 구체적이고 바람직한 사례를 들어줬을 뿐이고 그대로 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떻게 할 지는 회사에서 알아서 할 일이죠. 원래 공시는 그런겁니다. 알아서 하고 알아서 책임지는 거죠" "썩은 계란이라도 썩었다고 알리고 나면 시장에서 팔 수 있다"는 게 공시제도의 개념이긴 합니다. 다만 얼마나 썩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어느 수준까지 어떻게 밝혀야 하는지의 기준은 금감원이 정하고 감독해야 하지 않을까요. 알아서 하고 알아서 책임지는 게 공시라면 금감원은 왜 "공시감독국"이라는 부서를 만들고 월급을 받아가는지 묻고 싶습니다. 한 상장기업의 공시담당자는 요즘 금감원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합니다. "그동안 공시 문구 하나하나에도 귀찮으리만큼 잔소리를 하던 금감원이 5%룰의 자금출처에 대해서는 제발 묻지 말고 알아서 좀 하라고 부탁에 가깝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는 지는 모르겠지만 성의껏 해달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서슬퍼렇던 금감원도 이제 정말 서비스 기관으로 바뀌는 건지. 참 이상하더군요" 5%룰을 둘러싼 혼란이 이어지면서 모두들 금감원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인 기준을 알려줘야 할 때입니다. 금융기관의 감독도 히딩크나 본프레레 감독에게 맡기자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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