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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더스토리’(INDUSTORY)
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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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의미의 채권은 영란은행으로부터 출발했다. 초기에 금보관증을 발행하던 영란은행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워털루 전쟁으로 확보한 막대한 금 보유고를 바탕으로 금 본위제를 공식 선언한다. 영란은행은 풍부한 금보유고를 바탕으로 영국 정부에 사실상 무제한의 파운드를 공급했고, 영국정부는 은행 측에 차용증을 써줬는데 이것이 바로 국가 채권 ‘국채’다.
정부가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는 국채의 개념은 중앙은행이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사들인다’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채권 자체는 고정된 권리를 보장하지만, 채권 수익률은 시장 금리와 반비례로 연동한다. 따라서 은행은 자신들이 보유한 채권을 시장에 내다 팔면서 채권 시장이 형성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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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 대전으로 채권시대 본격 개막
금본위제는 ‘뱅크런’이란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화폐 보유자들이 동시에 중앙은행으로부터 금을 요구했을 때 그만큼의 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은행은 물론 국가 경제 자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영국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내에서 발권한 화폐를 식민지 개척과 식민지 전비로 소진하는 방식으로 파운드의 가치 하락을 막았다. 하지만 전쟁과 팽창에 의한 통화 시스템 유지가 장기간 지속하면서 유럽 전역과 전 세계가 전장으로 전락한다.
유럽 전역에 번지던 전화는 독일 제2제국이 탄생하면서 소강상태를 맞는다. 통일 전쟁과 보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제국 성립 후에는 천재적인 외교술을 발휘해 주변국과 전쟁을 철저히 억제하는 ‘비스마르크 시스템’을 고안한다. 비스마르크 시스템은 각국을 2중, 3중으로 동맹을 맺어 라이벌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한번 터지면 국가 간 전쟁이 대규모 동맹전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라 어느 국가도 쉽사리 전쟁을 시작하지 못했고 평화의 시대는 30년 이상 이어졌다. 하지만 1914년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울려 퍼진 총성으로 비스마르크 시스템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발발한 1차 세계 대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참호전’으로 발전한다. 전선에 참호를 파고 적군이 오길 기다리는 참호전은 일진일퇴의 공방만 거듭할 뿐 전쟁의 승패가 쉽게 갈리지 않았다. 여기에 독가스, 기관총 등 대량 살상무기가 도입되면서 인명피해도 커졌다. 무엇보다 전쟁 참전국이 감당해야 할 전비가 기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증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비 조달을 위해 유럽 각국 정부가 내놓은 방안은 ‘전쟁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채권은 정부와 중앙은행 간의 거래에 한정됐지만 1차 세계 대전에서 전쟁 채권의 판매 대상이 일반 국민으로 확장된 것이다. 전쟁 채권은 전비를 충당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각국 정부는 앞다퉈 전쟁 채권 판매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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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채권으로 탄생한 파시스트 정권
1차 세계 대전의 기운이 무르익던 시기는 사회주의 혁명가에게도 기회였다. 블라디미르 레닌을 포함한 유럽 혁명 지도자들은 전쟁이 벌어질 경우 사회주의 행동 강령을 다룬 1912년 바젤 선언을 선포한다. 전쟁이란 자본가와 봉건 왕조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투는 것이므로 유럽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그 틈을 타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쟁취하자는 것이 이 선언의 골자였다.
그러나 바젤 선언은 외려 사회주의 세력을 양분시켰다. 일부 세력이 레닌에 반발하고 자국의 1차 세계 대전 전쟁 채권을 사들이는 데 적극 동참한 것. 이들 ‘조국방위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베니토 무솔리니다. 젊은 시절 열혈 사회주의자였던 무솔리니는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사회주의에서 결별하고 이탈리아군으로 복역하면서 민족주의 의식을 싹 틔웠다.
원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는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프랑스의 편에 서면서 승전국의 지위를 얻는다. 하지만 전후 협상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요구 사항이 철저히 무시되면서 이탈리아 국민들은 승전국으로서 보상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무솔리니는 이 점을 노렸다. 무솔리니는 로마 집정관 호위병들이 들고 다니던 ‘파스케스’에서 이름을 따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의미에서 ‘파시즘’을 주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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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교황청과 무솔리니 정권은 ‘라테란 협정’을 체결한다. 라테란 협정은 △바티칸 시국의 완전한 독립 △이탈리아 통일 전쟁 보상금 7억 5000만 리라 지급 △연간 5%의 이율로 이탈리아 정부가 발행하는 장기 공채 10억 리라 지불 등의 조항이 담겼다. 결과적으로 경제적·정치적 독립이 절실했던 바티칸 시국의 상황이 파시스트 정권이 탄생하는 데 일조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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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중 무역 분쟁의 원인, 채권 리사이클링
2차 세계 대전 막바지, 미국의 유럽 전장 참전 대가로 세계 각국은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하는 브레턴우즈 체제에 합의했다. 이 협약으로 미국 달러는 기축통화가 됐고 세계 경제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던 미국은 결국 금 태환 포기를 선언하고 브레턴 우즈 체제는 붕괴한다. 미국은 석유수출기구(OPEC)에서 생산하는 석유를 달러로만 거래하기로 사우디아라비아와 밀약을 맺어 달러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축통화국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를 발행할수록 무역적자가 심화한다는 트리핀의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트리핀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채권 리사이클링’ 시스템을 고안했다. 미국은 1970~80년대 제조업 강국으로 떠오른 일본의 제품을 무제한 수입하는 방식으로 달러 발권을 했다. 일본은 막대한 무역흑자로 확보한 달러로 미국의 국채를 사들였다. 미국은 이러한 채권 리사이클링으로 트리핀의 딜레마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채권 리사이클링으로 미국은 쌍둥이 적자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재선을 위해 ‘레이거노믹스’라는 무리수를 둔 레이건 정부가 무역 적자뿐 아니라 막대한 재정 적자를 낸 것이다. 레이건 정부는 이 문제의 원인을 일본에 돌리고 엔화 절상으로 일본을 압박했다. 결국 일본은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엔화의 가치를 두 배 가까이 절상해야 했다. 플라자합의로 ‘엔고 현상’이 이어지자 일본 제조업은 가격 경쟁력을 잃고 무너졌고, 잉여 자본은 부동산에 몰렸다. 결국 그 거품이 꺼지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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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의 몰락을 지켜본 중국은 언젠가는 시작될 미국의 압박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전략이 육로와 해로를 걸친 금융·물류·문화 경제 벨트를 구축하는 ‘일대일로’ 사업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주변국을 포섭한 방법 역시 ‘채권’이다. 중국은 경제가 어려운 국가에 막대한 차관을 제공해 일대일로 사업 참여를 종용했다. 중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채권을 이용해 경제·안보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임 박사는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 최상위 목적은 경제 협력 블록 구축을 넘어 미국 일국 체제에 대항하는 ‘항미’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축통화 유지를 위한 채권 리사이클링 관점에서 미·중 무역전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도, 중국도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각자 대비해 오던 일이 현실화한 것뿐”이라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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