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유정 기자] 2006년 가을. 노벨상 발표로 세계의 이목이 한창 쏠려있던 스웨덴 스톡홀름을 찾았다.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를 헤맨 끝에 100년은 더 된 듯한 박물관 같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인베스터(Investor AB)`라는 작은 깃발이 눈에 들어오자 어느덧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1916년 설립돼 엘렉트로룩스, 사브, 에릭슨, ABB, 스톡홀름엔실다은행(SEB) 등 내노라하는 세계적인 기업들을 거느린 발렌베리(Wallenberg) 가문의 지주사가 있는 곳이다.
발렌베리는 유서 깊은 가문이다. 2차 대전 당시 외교관 신분으로 헝가리 유태인 수 십 만명을 구해낸 `스웨덴의 쉰들러` 라울 발렌베리를 비롯,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경영자들을 무수히 배출했다.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회사 탐방을 시켜주던 기업 커뮤니케이션 총괄 담당자는 "인베스터 AB가 이끄는 기업들은 스웨덴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지나친 자신감이 아닐까 싶어 자료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 방금 전 생각에 부끄러움이 배었다. 인베스터 AB의 주주를 살펴보면 주요 대주주 가운데 크누트앤앨리스발렌베리 재단과 마리앤느마쿠스발렌베리재단, 마쿠스앤아말리아발렌베리 추모재단 등이 자리하고 있다. 순이익의 상당 부분이 이들 재단으로 돌아간다. 이를 통해 인베스터 AB는 스웨덴의 과학 인재 양성을 돕고 있다.
차등주 제도를 두고 있어 소유 지분이 적더라도 훨씬 큰 영향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한 점도 특징이다. 발렌베리는 일반주보다 의결권이 10배 이상 높은 주식을 확보하고 있어 편법으로 계열사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
발렌베리 가족 기업은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고, 스웨덴 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의 40%를 차지할 만큼 자국 내에서 엄청난 위상을 갖고 있다. 하지만 피터 발렌베리 CEO와 제이콥 발렌베리 회장의 재산은 수백억원 수준으로 1조원 이상의 부를 축적한 한국 재벌들과 비교해 무척 소박하다.
발렌베리 일가와 경영진의 방한을 이틀 앞두고 우리의 대표 기업 삼성그룹에 이목이 쏠렸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방해로 4억원의 벌금 폭탄을 맞았다는 소식 때문이다. 휴대폰 유통 관련 현장조사 과정에서 증거자료를 없애고 허위자료를 제출하는 등 조사를 방해하고 내부적으론 해당 행위를 칭찬·독려하는 도덕적 해이 마저 드러났다. 게다가 상속권을 둘러싼 집안 싸움과 소송전은 외신을 통해 수차례 보도됐다.
발렌베리 기업이 15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은 단지 스웨덴 국가경제를 책임지고 있거나 혹은 덩치가 크기 때문 만은 아니다. 자회사 경영에 대한 철저한 독립성과 투명한 경영 등 기업경영 그 자체에서 `존경`을 이끌어내는 데 비결이 있다. 스웨덴 재계를 대표하는 브랜드를 `존경받는` 방식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존심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최고운영책임자·COO)이 지난 19일 마르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 등 경영진 일행과 비공개 만찬 회동을 가졌다. 오너 경영 전반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겠느냐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삼성이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인정받기 위해 `한 수` 배우는 자리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