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최근들어 불거져 나오고 있는 조기 경기회복론은 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금융권에서만 맴돌고 있는 막대한 단기부동 자금이 주식과 부동산시장으로 쏠리면서 형성된 섣부른 낙관론이 또 다른 함정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칫 잠재성장률의 근간을 이루는 투자, 고용, 소비 등 경제 펀더멘탈의 별다른 개선없이 돈의 힘에 의해 자산거품만 키워내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 후유증은 클 수 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위기 극복 이후를 대비한 기업구조조정이 물건너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 마저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실물부문의 신용경색과 선진국의 경기침체가 여전히 진행중인 상황에서 우리만 홀로 시중의 유동성을 옥죄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미국의 대공황`이 각 국 정부의 경기사이클 오판에 따른 긴축정책 도입으로 더욱 깊고 길어졌다는 역사적 교훈도 정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정부 입장에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던 작년말보다 지금이 정책적 실기(失機)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추경 등 재정 조기 집행을 통한 확장적 거시정책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정부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또 자산거품 방어를 위해 확장적 정책기조를 긴축 방향으로 돌리는 `출구(Exit) 전략`은 향후 경기회복이 가시화된 이후에나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한국은행도 정부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잉유동성을 걱정할 단계가 아닌 만큼 '출구전략'을 거론할 시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와 한국은행이 유동성 과잉 가능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해야한다는 안팎의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어느 시점에, 어떤 대응책이 인플레이션 방어를 위해 강구될 것인가는 향후 최대 관심사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 대외의존형 경제의 `아킬레스건`..세계 교역량 급감
정부가 재정 투입 등 확장적 거시정책을 통한 유효수요 창출에 매진하는 이유는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건이 괜찮은 중국에 대한 수출 비중이 가장 크고 수출 다변화도 상당히 진척됐지만 내년까지 이어질 선진국의 경기침체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IMF가 최근 발표한 세계경제전망(World Economy Outlook)에 따르면 올해 세계 교역량은 전년대비 11% 급감하고, 내년에는 고작 0.6% 늘어나는데 그칠 전망이다.
최소한 이 기간동안은 우리 수출이 확대 국면으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미국의 과소비→동아시아 수출 및 무역수지 증가→동아시아 미국 국채 매입→미국의 과소비..`라는 `글로벌 불균형의 확대 재생산 구조`를 더 이상 만끽하기 어려운 국면이다.
따라서 정부가 민간을 대신해 유효 수요를 상당기간 만들어주지 못하거나 위기 극복 이후를 대비한 기업구조조정이나 산업구조 고도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향후 잠재성장률을 훼손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1분기 GDP 성장률만 보더라도 정부의 재정 조기집행 등에 따른 기여도는 최근 2년간 평균인 0.6%포인트의 3배에 가까운 1.5%포인트. 1분기 성장률이 전년동기대비 -4.3%를 기록한 점을 감안할 때 민간부문이 GDP를 5.8%포인트 끌어내린 셈이다. 민간의 자생적인 경기회복력은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상반기 수출 경쟁력에 상당한 보탬을 줬던 환율이 연중 최저치로 급락, `환율 프리미엄`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난 3월2일 1570.3원까지 치솟았던 달러-원 환율은 두달여만인 11일 1237.9원으로 마감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포커로 치자면 작년 4분기 돈을 왕창 잃고 올들어 조금 따거나 본전하는 수준인데, 벌써부터 경기회복론이 나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며 "정부는 대내외 불확실성을 감안해 확장적 정책기조를 유지하고 효율적으로 집행하는데 매진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고무적인 부분도 있다. 세계 교역량 급감과 수출 단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수출 물량이 급감 추세를 보이기 전인 작년 10월 수준으로 회복됐다. 3월 수출 물량은 1308만톤으로 전월대비 10.9% 증가, 작년 10월의 1302만톤을 웃돌았다. 이는 우리나라 주력 수출 품목의 세계 시장점유율이 상승하고 있다는 의미다.
◇ 잠재성장률 4%대 회복 가능할까..`구조조정 등의 함수`
정부의 핵심 고민중 하나는 위기 극복 이후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 회복이다. 평가 기관과 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글로벌 위기 이전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대략 4%대였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글로벌 위기 전 2000년대 세계 경제는 과잉 유동성에 의한 경제주체들의 과도한 레버리지를 바탕으로 소비와 투자가 이뤄졌다. 그래서 거품 경제가 극에 달했고, 결국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촉매로 대형 은행들이 부실화되면서 그 거품이 붕괴된 것이다. 따라서 이 당시의 세계 잠재성장률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김주형 LG경제연구원 원장은 "2001~2007년 구매력 평가지수 환율로 가중 평균해 보면 세계 잠재성장률은 4.0%로 산출된다"며 "그러나 앞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률은 80~90년대의 3%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이고, 우리나라의 2009~2014년 5년간 잠재성장률도 3.7%로 내려갈 것"이라고 추정했다.
정부가 향후 경제체질 개선을 위한 기업구조조정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까닭은 이런 맥락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처럼 무차별적인 기업구조조정은 오히려 성장동력을 훼손할 소지가 많다. 하지만 기업 및 산업의 군살을 빼고 기초 체력을 다지는 적절한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위기 극복 후 `점프`하기란 쉽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위기 국면이 장기화된다면 단기간에 기업 부실이 쏟아지고 은행이 부실화돼 경제전반의 성장활력이 크게 떨어지는 극심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우리 경제가 G20 국가중 가장 빠른 회복속도를 보일 것이라는 정부의 목표 달성 여부는 기업구조조정의 성패에 좌우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정부는 올해 우리 경제가 -2% 역성장한 뒤 내년 4% 성장세로 회복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정부는 이번주중 45개 주채무계열중 재무구조개선약정(MOU)을 체결할 기업집단을 확정하는 등 기업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은행들은 업황 특성, 현금흐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중 11개 기업집단과 MOU를 맺을 것으로 알려졌다. 또 빠르면 주말께 총한도 40조원 구조조정기금의 세부 운용 계획도 발표한다.
그러나 조기 경기회복론이 불거져 나오면서 채권단 중심의 기업구조조정이 계획대로 탄력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만만찮다. 낙관과 비관의 경제신호가 혼재하는 상황에서 극심한 고통을 수반해야 하는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은 거세질 가능성이 적지 않고, 명분도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성장잠재력 회복과 경기회복 시기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구조조정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서 입증됐듯이 구조조정이 제대로 안되면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그 회복의 잇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며 경기회복 기대감에 따라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구조조정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 출구 전략 아직 아니지만..`절묘한 타이밍의 싸움`
정부는 지금의 확장적 정책기조를 긴축 방향으로 선회하는 출구 전략을 향후 경기회복이 가시화된 이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경기가 여전히 부진하고 시중 유동성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인 만큼 유동성 문제는 현 확장 기조를 당분간 유지해야 된다는 것.
한국은행도 12일 기준금리를 석달 연속 연 2%로 동결한 뒤 과잉유동성을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이성태 총재는 "금융경제 환경이 크게 바뀌는 상황에서는 상당수가 유동성을 단기 형태로 갖고 있는 게 의례적이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문제를 일으켜 무슨 대책을 써야되는 상황까지는 아니다"고 말했다. 또 "경기후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현저하게 살아난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 당분간 지속되지 않게나 한다"며 "아직은 불안요소가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와 한국은행이 미래의 과잉유동성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해 나가야할 시점이 다가온 것은 분명하다. 선제적인 통화정책의 타이밍을 놓치면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과거 금융위기 때마다 봐왔기 때문이다. 각국 중앙은행은 기준금리 인하 등 풍부한 유동성으로 경제성장을 견인한 공도 세웠지만 반면에 과잉유동성으로 자산버블을 키우는 화를 동시에 초래했던 경험도 갖고 있다. 저금리 정책은 `양날의 칼`과 같다.
전문가들은 근시일내 유동성을 흡수할 상황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유동성 과잉에 대처하는 시나리오별 방안을 철저하게 세워야할 때라고 주문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달부터 본격 추진될 미국의 금융부실 정리대책이 어떤 성과를 내는지를 주의깊게 봐야한다"며 "차질을 빚어 금융불안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으면 통화정책은 완화기조를 그대로 유지해야 하지만 성과를 낸다면 통화유통속도가 빨라져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수 있는 만큼 긴축방향으로 전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