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edaily 정명수특파원] 지난달 US오픈 구경을 갔다. 내 평생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를 언제 또 실물로 볼 수 있겠는가. 큰 맘 먹고 티켓을 끊었다. 대회 공식 웹 사이트를 찾아봤다. 음료수나 음식은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5만명 관중을 어떻게 먹일 셈일까. 교통 문제는 또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일까.
그 주에 우연히 맨해튼 카네기 홀에 갈 일이 생겼다. 센추럴 파크 바로 아래 57번가에 자리잡은 카네기 홀은 생각만큼 근사하지는 않았다. 연주회 중간 화장실에 가려고 나섰다가 `시티 카페`라는 휴게실을 발견했다. 시티그룹에서 마련해준 카페란다. 시티그룹과 카네기 홀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일까. 자꾸 엉뚱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시네콕 힐즈로 가는 길
월가도 접대를 한다. 중요한 고객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다. 접대도 비즈니스다. 골프도 그 중 하나다. AIG그룹은 뉴욕 인근에 호화 골프장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AIG 임원과 고객을 위한 전용 골프장이다. 다른 골퍼들은 아예 받지도 않기 때문에 골프장에 문패도 없다.
US오픈같은 메이저 대회도 접대용으로 안성마춤이다. 골프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대회이니만큼 골프를 좋아하는 고객들에게 티켓을 돌리면 효과 만점이다.
그러나 월가의 접대는 그 이상이다.
올해 US오픈은 뉴욕 롱아일랜드 사우스햄톤에서 열렸다. 이 지역은 부자들의 여름 별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US오픈이 열린 시네콕 힐즈 골프장은 바로 사우스햄톤 입구에 있었다.
시네콕 힐즈는 1891년에 만들어진 미국 최초의 18홀 골프장으로 현대 골프장에 비해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 더구나 사우스햄톤 같은 비싼 동네에 대규모 주차장이 있을 리 없다.
자동차를 몰고 골프장으로 가는 유일한 도로로 접어들자 "일반 관중들은 A 주차장을 이용하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A 주차장은 골프장에서 20여분 떨어진 지역 공항이었다. 여기서 셔틀 버스를 타고 골프장으로 이동하게 돼 있었다.
일반 관중들이 있다면 특수 관중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주최측은 `특수 관중`을 위한 B, C, E 등의 주차장을 별도로 만들었다. 미국 골프 협회(USGA)는 후원사(corporate sponsors)들에게 별로도 대회 입장권을 판매했다. 이 티켓을 가진 관중들은 골프장에서 비교적 가까운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후원사들은 USGA로부터 넘겨받은 티켓을 자사의 고객들에게 접대용으로 돌렸을 것이고, 이 티켓을 가진 관중들은 골프장 입장 단계부터 `차별 대우`를 받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A 주차장을 이용하는 다수의 미국인들도 아무런 불만없이 셔틀 버스에 올라탔다.
유명 선수들의 멋진 스윙 동작에 감탄하는 사이 점심 때가 됐다. 대회장 곳곳에 설치된 식료품 판매대에 줄을 서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사야했다. 타이거 우즈의 신기한 벙커샷을 본 것은 정말 좋았지만, 핫도그 하나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야하는 것은 분명 고통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골프장 홀과 홀 사이 대형 천막이 군데군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천막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는 마실 것과 먹을 것이 그냥 제공되는 듯했다.
"아하. 특수 관중용" 나중에 US오픈 관련 기사를 읽다가 이런 천막이 56개나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특수 관중들`은 아침식사로 벨기에 와플, 캐나다 베이컨, 머핀, 베이글을, 점심으로 안심, 게살 케익, 샐러드, 양고기, 닭고기 등을 즐겼다.
이들은 우아하게 한 손에 백포도주를 들고, 천막 앞에 설치된 파라솔 그늘에 앉아, 필 미켈슨이 5번 아이언으로 세컨 샷을 날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일반 관중으로 US오픈에 온 것이 아니라, 거래하는 투자은행의 초청으로 이곳에 왔고,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해보라. 앞서 말했듯이 사우스햄턴은 별장지대로 이름이 높다. US오픈을 보면서 하루 숙박료가 300달러를 호가하는 호텔까지 제공받는다면, 난감한 세일즈 상담도 저절로 해결될 것 같았다.
실제로 US오픈 기간 중 사우스햄턴의 호화 숙박 시설들은 초만원을 이뤘다. 이것도 모자라, 해변가와 시네콕 힐즈 인근의 일반 주택들은 불법 임대로 일주일에 최대 5만달러라는 엄청난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사우스햄턴 타운 조례는 한달 미만의 단기 주택 임대를 금하고 있다.)
◇골프와 비즈니스
이쯤되면 골프는 스포츠의 차원을 넘어선다.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금융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월스트리트는 골프 그 이상의 접대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월가가 골프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 스포츠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어떤 이유로 중요한 고객들이 `자치기`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자. 월가는 당장 자치기 전용 클럽(?)을 만들어 고객들의 환심을 끌 것이다. 클럽 하우스도 근사하게 만들고, 최고급 음식을 제공할 것이다.
자치기의 작은 자와 큰 자에도 상표가 붙어서, 나이키 작은 자, 타이틀리스트 작은 자, 탑 플라이트 작은 자 등이 생산될 것이다. 큰 자를 생산하는 업체도 생겨서 켈러웨이 큰 자, 테일러 메이드 큰 자, 혼마 큰 자 등이 경쟁을 벌일 것이다. 월가는 자치기 메이저 대회 후원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고객들이 자치기를 좋아한다면 자치기도 골프만큼이나 고급스러운 운동으로 얼마든지 치장할 수 있다.
순수하게 스포츠의 입장에서 보면 자치기와 골프를 비교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는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고객들이 자치기가 아니라 골프를 훨씬 좋아하고 있으니, 월가도 자연스럽게 골프를 매개로한 비즈니스에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번 US오픈이 열린 시네콕 힐즈 컨트리 클럽의 면면을 보면 골프와 비즈니스의 관계가 좀 더 뚜렷해진다. 이 골프장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이한 외형을 한 클럽 하우스가 인상적이다. 이 클럽 하우스는 1892년 미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것이다. 당시 미국 최고의 건축가였던 스탠포드 와이트가 설계했다. 와이트는 매디슨스퀘어가든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와이트는 골퍼들이 라커룸 이외에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골프장을 드나드는 재력가들은 단순히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런두런 모여 앉아 정치, 사회, 경제를 논하는 폐쇄적인 클럽을 원했다. 이들은 빅토리아 풍의 라운지 앉아 자연스럽게 사업 얘기를 주고 받았고, 사무실로 돌아가서는 계약서를 작성하곤 했다.
시네콕 힐즈는 지금도 275명 회원 중 결원이 생겨야만 신규 회원을 받아들인다. 성별이나 인종이 결격 사유가 되지는 않지만 신입 회원은 나머지 회원 전체의 동의를 받아야만 회원 자격을 얻을 수 있다. 회원 중에는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로 악명이 높은 존 메리웨터, LBO(Leveraged-Buyout)의 제왕이라는 헨리 크라비스 등이 포함돼 있다.
회원 자격 심사에만 5년이 걸린다. 회원 신청을 하려면 기존 회원 7명의 추천이 필요하다. 추천을 받은 회원은 전 회원에게 자신의 상세한 이력이 담긴 편지를 보내야한다. 가족, 친구, 골프에 대한 애정 등이 진솔하게 담겨 있어야한다.
회원권 가격은 얼마나 할까. 최고 사교 클럽의 기능을 가진 다른 골프 클럽과 비교해보면 시네콕의 회원권은 상대적으로 싼 편이다. 시네콕의 회원 자격을 얻으면 일단 5만달러를 내고, 연간 6000달러씩 회비를 내야한다. `아틀란틱`이라는 골프 클럽의 회원권은 20만달러를 호가한다고 한다.
회원 자격을 얻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만큼, 회원들의 면면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페쇄적인 클럽 안에서 오고가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비즈니스와 연결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카네기 홀은 57번가의 골프장
월가는 스포츠뿐 아니라 음악, 미술 등 예술도 사업의 매개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카네기 홀과 시티그룹 샌디 웨일 회장의 관계다.
웨일 회장은 카네기 홀 운영이사회의 의장이다. 그는 카네기 다음으로 카네기 홀에 기부를 많이한 사람이다. 카네기 홀에는 웨일 회장의 이름을 딴 실내악 콘서트 홀이 있을 정도다.
웨일 회장은 월가의 밑바닥에서 시티그룹 회장에 오를 때까지 정신없이 일에 매달리는 바람에 예술에 신경쓸 겨를이 없던 사람이다. 그런 웨일 회장이 카네기 홀에 이렇듯 공을 들이는 이유는 뭘까.
카네기 홀은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아이작 스턴이 백기사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삼류 극장으로 전락할 위기에 몰렸었다. 카네기 홀이 재정적인 어려움에 허덕일 때 아이작 스턴은 자신의 명성을 이용, 월가 투자은행의 거물들을 운영이사회에 영입, 제2의 카네기 홀 창건에 나선다.
스턴은 웨일 회장이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를 이사회 멤버로 끌어들였다. 웨일 회장이 아멕스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스턴은 웨일과의 친분을 계속 유지했다.
스턴은 웨일 회장에게 "카네기 홀은 57번가에 있는 골프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실 밖에서 비즈니스를 진행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소인 것이죠"라고 말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오페라 혹은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는 날이면 카네기 홀 운영이사회 멤버 전원이 특별 게스트로 초대를 받게 된다. 공연 중간 휴식시간에 이들은 특별히 마련된 공간에서 간단한 음료를 마시며 삼삼오오 대화를 나눈다. 웨일 회장은 월가의 유력자들이 한 구석에서 조용히 귓속말을 나누는 것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웨일 회장 자신도 카네기 홀 운영이사회에서 친분을 쌓은 월가의 다른 인사들과 여러차례 굵직한 거래를 성사시켰다. 웨일 회장은 보잘 것없는 학력에 유태인이라는 핸디캡을 이같은 `사교의 장`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카네기 홀은 맨해튼 중심부에 있지만, 예술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큼 웅장하거나, 고풍스러운 건물이 아니다. 공연장 내부도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과 비교할 때 이렇다할 차이 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카네기 홀이 뉴욕의 명소가 되고, 고급 사교장으로 자리잡은 것은 하드웨어때문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때문이다. 시네콕 골프장 역시 다른 고급 골프장에 비하면 초라하게 보일 정도였다. 페어웨이는 좁고, 짧았다. 그린 위치도 고약했다. 그늘집같은 부대 시설도 전무했다.
어떤 인물들이, 어떤 목적으로 만나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나누느냐가 그 공간의 용도와 품위를 결정한다. 월스트리트식 접대의 핵심은 외형적인 화려함이 결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