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고생을 해가면서 여행을 하나 싶다. 기를 쓰며 하나라도 더 보고 느끼자는 의지도 사라진다.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어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 자체가 다시 일상이 돼 버린 것이다.
▲ 한적한 고아 베나울림 해변 | |
`푹 쉬고 난뒤 다시 일상탈출의 기분을 맛보며 여행을 하자!`
고아의 여러 유명한 해변 가운데에서도 조용하고 목가적이라는 베나울림 해변을 골랐다. 기차가 고아에 들어서자 차창밖 풍경이 달라진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바깥 풍경은 색다르다. 과거 포르투갈의 영토였던 만큼 눈부신 하얀색 바탕에 푸른색으로 포인트를 준 성당들이 눈에 띈다. 전통 의상인 사리 보다는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더 많다.
드디어 마드가온역에서 도착했다. 여느 인도의 기차역과는 사뭇 다르다. 바닥 여기저기에 누워있는 사람들도 없고 부산스럽지도 않다. 무엇보다 깨끗하다. 몰려드는 호객꾼도 없다.
고아의 명물이라는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큰 야자수가 늘어선 남국의 한산한 도로길을 달리는 기분도 상쾌하다. 바람이 시원했다. 매연과 먼지, 사람들로부터 해방된 느낌이다.
▲ 고아 여인들이 생선을 널어놓고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 |
가이드북에 나온 숙소 중에 코코헛에 가자고 했다. 해변 바로 앞에 위치한 곳이라 마음껏 바다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그 곳이 어딘지 모르는 눈치다. 물어 물어 어렵게 코코헛을 찾았는데 론리플래닛의 설명과는 좀 다른 듯 했다. "오두막과 해변에 괜찮은 식당이 있고 친절한 부부가 운영하는데, 자기네 요트로 관광을 시켜주기도 한다" 오두막은 맞는데 식당은 없고 주인은 부부가 아닌 총각인 듯 했다. 요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코코헛이 맞다니 짐을 풀었다.
오두막에서 창문을 열면 바로 아라비아해가 보였다. 해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사람은 없고 갈매기와 개만 보인다. 한가롭고 평온하다. 조금 더 걸으니 인도 아저씨가 개를 한마리 데리고 해변에 나와 낚시를 하고 있다. 낚시줄을 길게 던지고 팽팽하게 붙들고 있는 아저씨.
바닷가 한쪽에서는 아낙들이 잡은 생선을 널어놓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다. 푸른 들판에서는 소들이 풀을 뜯고 아낙들은 잡초를 뽑는다. 코코넛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는 모습도 보인다.
끈덕지게 와서 말 시키는 사람도 없고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도 없다. 모두 자기 할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저 지나가면 '할로' 하고 인사하면서 싱긋 웃어주는게 전부다.
▲ 고아 베나울림 해변의 일몰 | |
해변에 있는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해산물 요리를 주문하고 인도의 유명한 맥주인 킹 피셔를 시켰다. 베나울림 해변의 노을도 점점 어둠으로 변하자 모여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적절한 취기에 파도소리도 적당해 오늘은 푹 잘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에게 주어진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자려고 누웠더니 모기의 웽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계속 불을 켰다 껐다 하면서 선풍기를 틀면 좀 잠잠해질까 해서 선풍기 강도도 조절해봤지만 그악스런 모기들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무는 건 괜찮다. 소리만 안 냈으면 싶었다.
모기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몸이 자꾸 가렵다. 온 몸을 벅벅 긁어대서 피가 날 지경이다. 빈대의 습격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해가 떠서 밝아질 기미가 보이자마자 얼른 짐을 챙겨서 도망치듯 그 숙소를 떠났다. 날이 밝은 뒤에 보니 팔과 다리, 심지어 얼굴까지 빈대 물린 자국이 역력하다. 이마에 잔뜩 여드름이 난 것 같은 모습이다. 천국의 낮과 밤은 그렇게 달랐다.
▲ 하루 일과를 마친 고아 여인들이 마른 생선을 챙겨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 |
찌든 때를 벗겨낼 또 다른 낙원을 찾아야했다. 베나울림에서 버스를 타고 고아주의 주도인 빤짐으로 갔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나와서 칸돌림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 곳에 있는 아구아다 성을 보기 위해서다. 1612년 포르투갈인들이 세운 이 성에 오르면 아라비아해를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좋다고 했다.
칸돌림에서 내려서 걸었는데 한 5분이면 될 줄 알았던 길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것이었다. 지칠 때 쯤 나타난 이정표. 오른쪽은 싱킬림 해변, 왼쪽은 아구아다 포트(Fort Aguada)라고 돼 있다.
"오케이. 이거야" 하면서 계속 걸었다. 가이드북에는 성까지 포장된 길을 운전하면서 가도 좋고 마벨라 게스트 하우스를 지나 오르막길을 걸어가도 된다고 돼 있었다.
그런데 그 게스트하우스도, 그 뒷길도 보이지 않고 큰 도로만 끊임없이 이어진다. 중간에 한번 물어봤더니 2~3km는 가야 한단다. 방향은 맞다니 그 때부터는 오기로 걷는다.
오기로 천국을 찾아야 하다니.
1시간, 2시간..햇볕은 땡볕인데 그 놈의 오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 한참을 가서 코너를 돌면 보일까 설레였다가 실망한게 세네번? 지칠대로 지쳐서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는데 연인을 태운 오토바이, 가족을 태운 자동차들은 옆을 쌩쌩 지나간다.
갑자기 자동차 한 대가 옆에 멈춰섰다. 여행할 때 차를 태워준다는 등의 호의는 거절하는 게 나의 원칙이다. 특히 인도에서라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워낙 험한 사건 사고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워준다고 하면 냉큼 타고 싶었다.
언뜻 보니 뒷 자석에 두명이 타고 있어서 자리 하나쯤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세운 운전사는 나에게 아구아다 성까지 얼마나 걸리냐, 이쪽 방향이 맞냐 등을 물어봤다. 뒤에서 봐도 외국인임이 확 티가 나는 나에게 이런걸 묻다니..
나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더니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잽싸게 창문을 올리고 쌩하니 가버렸다. 허탈해졌다. "나도 한국에 가면 내 차가 있다고!" 중얼거리면서 또 터벅 터벅 걸었다.
▲ 포르투갈 분위기가 물신 나는 고아주의 수도 빤짐, 하얀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성당이 곳곳에 있다. | |
성 자체는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지만 성 앞에 서서 아라비아해를 보면서 바람을 맞으니 시원했다. 힘들게 한걸음 한걸음 뗄 때 그 옆을 쌩쌩 지나갔던 오토바이탄 커플, 관광차 다 여기에 주차돼 있다.
목과 얼굴은 이미 까맣게 탔다. 지친 탓에 포트는 대충 둘러보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앉았다. 나중에 길을 물어보니 산길로 따라 가면 10분만에 내려간단다. 정말 오솔길을 따라 10분도 안 걸려 처음 이정표가 있었던 곳까지 내려왔다. 축지법을 쓴 기분이다.
그날 터덜터덜 지친 몸으로 숙소로 돌아온 나는 씻고 나서 가져간 옷 중에 여행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블랙 원피스를 입고 정성들여 화장을 했다. 그리고는 빤짐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호텔 베니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곳에서 인도 고아식 소세지라는 추리소(chourisso) 요리를 먹었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힘든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보상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천국이지!`
쉬려고 찾았던 고아에서 나는 가장 강도높은 극기훈련을 한 셈이다. 인도에서 돌아온지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탄 자국이 목둘레에 훈장처럼 남아 있다. 훈장에는 극기훈련중에 잠깐씩 맛본 행복감이 아련하게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