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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사건은 1968년 8월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북한 지령을 받은 인사들이 통혁당을 결성해 반정부적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다.
박씨는 1974년 민주수호동지회를 결성해 활동했던 재일교포 진두현씨, 한국에서 활동했던 김태열씨, 군인이었던 강을성씨 등과 보안사령부로 연행돼 고문받았다. 당시 정부는 고문을 통해 받은 진술을 토대로 이들이 통일혁명당 재건을 기도한 간첩단이라고 발표했다.
박씨는 국가보안법위반죄, 반공법위반죄, 간첩죄, 군기누설죄 등으로 기소돼 1975년 4월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 사형 선고를 받았다.
1심판결에 불복해 박씨는 항소했고, 일부 무죄(1971년 3월 통일혁명당을 구성해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점, 1971년 9월 하순 통일혁명당 가입 권유의 점, 간첩미수의 점)를 받았다. 하지만 나머지 공소사실이 유죄로 인정돼 사형 선고가 유지됐다.
2심 판결에도 불복해 박씨는 상고했으나 1976년 2월 대법원은 피고인과 검사의 상고를 모두 기각함으로써 재심대상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이후 1983년에 무기징역, 1990년에 징역 20년으로 다시 감형된 뒤 수감된 지 17년 만인 1991년 석가탄신일 특사로 박씨는 가석방됐다.
이후 2000년 8월 15일 잔형의 집행을 면제하는 동시에 복권하는 대통령의 명령으로 사면·복권됐다.
박씨는 출소 후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다 2012년 별세했다. 이후 유족이 2018년 12월 재심을 청구했고, 검찰은 재심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지난해 9월 재심에서 서울고법 형사12-1부는 박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무죄 판결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내용의 박씨와 공동피고인들의 경찰 및 검사 작성 피의자신문조서, 진술서 등은 불법체포·구금된 상황에서 수사를 받았고, 수사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볼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으므로 임의성 없는 자백으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설명했다.
또 “박씨의 제1심 및 재심개시 전 원심에서의 법정진술은 사선변호인의 조력을 받는 가운데 공소사실 중 상당수의 사실관계를 인정하면서 일부 내용을 수정하거나 부연하는 취지로 진술했으나 피고인이 불법구금, 고문 등 가혹행위로 보안사에서 임의성 없는 진술을 한 후 그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원심 및 재심개시 전 원심 법정에서도 계속된 상태에서 이뤄진 것으로서 그 역시 임의성 없는 자백에 해당해 증거능력이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어 “경찰 작성 압수조서와 압수물은 형식적으로는 박씨가 수사기관에 임의제출한 것으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그 실질은 불법수사 과정에서 얻어낸 진술에 기초해 강제로 수집된 증거임에도 영장 없이 압수가 이뤄졌으므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도 원심의 판단에 증거능력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