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 지역에서 간첩사건이 불거지며 국민들에 충격을 던졌다. “아직까지 간첩이 있다니”라는 반응과 함께 이른바 ‘스텔스 간첩’, ‘청주 간첩단’이라 이름 붙여진 ‘자주통일 충북동지회(이하 충북동지회)’의 실체에 관심은 더욱 높아지는 모양새다. 이미 1998년부터 충북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2017년 8월 위원장 손모씨, 고문 박모씨, 부위원장 윤모씨, 연락담당 박모씨 등 4명 체제를 구축해 북한의 지령에 따라 전방위적인 간첩활동을 벌인 것으로 수사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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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충북동지회 4명에 대한 검찰 구속영장청구서 등에 따르면 고문 박씨와 부위원장 윤씨, 연락담당 박씨는 1998년 충북지역 노동자 및 학생 연대조직인 ‘새아침 노동청년회’를 주도하다가 2001년 조직명을 ‘새세기 민주노동청년회’로 변경하고 같은 해 한 안경업체 노조위원장이었던 위원장 손씨를 조직원으로 영입한다.
지역 사회에서는 활동가로 알려졌지만, 국가정보원과 경찰 안보수사국은 실상 북한 대남공작조직 ‘문화교류국’에 포섭돼 지령을 받는 간첩으로 봤다. 이들이 작성한 대북보고문을 통해 고문 박씨는 2004년경, 위원장 손씨는 2010년경, 부위원장 유씨와 연락담당 박씨는 미상시기에 문화교류국에 포섭된 것으로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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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작성하거나, 2019년 11월 중국 한 대형마트 무인 물품보관함을 이용해 북한으로부터 2만달러의 공작금을 수령한 사실이 수사 결과 드러나기도 했다. 또 이들이 대북보고문에 포섭대상자로 언급한 인물은 60여명에 이르며, 실제 이들 중 북한이 직접 포섭을 시도한 인물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2019년 8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청주 일대에서 벌인 F-35A 도입반대 시위와 함께 ‘2022 북녘 통일밤 묘목 백만그루 보내기 운동’을 조직하고 전국 정당, 의회, 언론, 시민사회, 노동조합 등 300여 곳에 참여 제안문을 발송한 활동도 주목을 받았다.
◇北 지령문·대북보고문 84건엔 국내 정보 가득
특히 수사당국의 압수수색 결과 발견된 연락담당 윤씨의 USB에는 2017년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북한 지령문과 대북보고문 총 84건이 암호화 파일 등 형태로 저장돼 있었다. ‘인간의 조건37’, ‘다들 그래, 괜찮다고’,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 이야기’, ‘조화벽과 유관순’ 등 다소 뜬금없는 이름으로 저장된 해당 문서들엔 국내 정치·사회 정세와 관련된 다양한 지시 또는 보고가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2019년 3월 ‘2차 북미정상회담 계기 반미투쟁 활동’ 지시에서는 “반 트럼프 감정을 확산시키라”, “황교안이 당 대표로 등장한 이후 더욱 노골화되고 있는 자한당패거들의 발악정책동을 철저히 제압하라”라는 내용이 담겼다. 2019년 6월에는 “반보수 실천 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 최근 인기가 높은 유트브TV를 통한 공간을 잘 활용해보아야 한다”고, 2019년 9월에는 “국정원 해체를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지시하기도 했다.
2019년 10월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퇴 국면을 언급, 이를 계기로 동요하는 중도층을 쟁취해야 한다고 지시하기도 했다. 해당 문서에는 “자한당 의원들이 ‘아이낳는 도구’ 등 여성 비하 발언을 걸고 자하당을 여성천시당, 태생적인 색광당, 천하의 저질당으로 각인시켜 지역 여성들의 혐오감을 증대시키기 위한 활동을 조직하기 바란다”고 적혀있었다.
검찰은 이들이 이미 광범위하게 증거를 인멸·은닉한 데 더해, 위원장 손씨가 대표로 있는 충북청년신문을 통해 앞으로도 증거 인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법원에 구속영장을 신청해 위원장 손씨를 제외한 3명이 구속된 상태다. 검찰은 수사 상황을 이 신문을 통해 보도하는 형식으로 북한에 알려 추가적인 증거인멸이 이뤄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법조계 “2011년 왕재산 사건과 유사”
공안검사 출신 강정석 변호사는 이번 사건을 두고 “북한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며 과거 2011년 직접 기소와 공판에 참여했던 ‘왕재산 사건’을 떠올렸다. 왕재산 사건은 북한 대남공작조직 ‘225국(문화교류국 전신)’에 포섭된 5명이 ‘왕재산’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기밀을 수집하고 보고한 간첩 사건이다.
강 변호사는 “중국이나 동남아 등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고 국내에 들어와 각종 시민·사회단체에서 한 자리하며 활동하며 다른 인물을 포섭하거나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등 내용이 똑같다”며 “더군다나 왕재산 사건에서도 당시 피고인들은 ‘조작된 수사다’, ‘수사절차가 위법하다’고 주장하며 실체에 대해선 진술을 거부했었는데, 이번 사건도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모양”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유사한 간첩사건이 10년 사이 또 일어났는데 국가보안법 폐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나”라며 “현재 국정원 직원들이 해외를 돌며 추격하고 사진 찍고 하는 수사를 지금 경찰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왕재산 사건이 새삼 회자되는 가운데, 송강 청주지검 차장검사도 함께 주목을 받는다. 송 차장은 강 변호사와 함께 왕재산 사건을 기소한 인물로, 검찰 내 대표적인 공안통으로 꼽힌다. 고검장 출신 한 변호사는 “송 차장은 당초 수원지검에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관련 사건을 맡았다가 청주지검으로 발령나며 사실상 좌천됐는데, 공교롭게도 간첩사건을 맡게 된 셈”이라며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