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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유경희 칼럼니스트] "디오니소스 신의 세례를 가장 많이 받은 예술가는 누구일까요?"
"반 고흐? 그리고, 음음 왜 물감 막 흩뿌리는 화가 있잖아요. 맞다! 잭슨 폴록이요!"
꼭 화가라고 묻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이구동성 반 고흐와 같은 극적인 인생을 살다간 화가를 지목한다. 도취와 광기, 창조와 충동의 신으로서 디오니소스를 떠올릴 때 이런 대답은 참 자연스럽다. 이런 대답을 듣고 있으면,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어떤 장르의 예술보다도 미술이 훨씬 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 근현대 화가들이 보여주었던 열정과 광기의 매혹적인 드라마 같은 인생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작품이 아닌 삶에 집중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대답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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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하더라도, 니체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리스 조각이 아폴론적이라고 규정할 때, 사실, 회화보다는 조각이 훨씬 더 아폴론적인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더군다나 소조(뼈대를 세우고 찰흙을 덧붙여가며 만드는)에 비해 조각(볼륨을 떨어내며 만드는)은 한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비율과 규칙 그리고 질서와 조화를 추구해야만 하는 이상적인 예술인 것이다. 더군다나 조각의 도구들은 한치의 실수도 용인하지 않는 강력한 무기들이 아닌가! 잘못 다루었다간 조각가의 생명이 위험하다. 회화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뛰어난 영감으로 작업한다 하더라도 작업의 과정만큼은 마치 공장에서 작품을 생산하듯이 또랑또랑한 맨 정신이어야만 한다. 외부를 재현하는 회화의 전통에서 물감을 개고, 일관한 색을 만들어내고, 밑그림을 그리고,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해내는 일이 얼마나 깐깐한 이성을 요구하는 일인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사상 낭만주의는 좀 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 할만하다. 적어도 내용면에서는 그렇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전 유럽에 탄생한 낭만주의는 개성을 구가하고 자아의 해방을 주장하며, 상상과 무한적인 것을 동경하는 주관적·감정적인 태도가 두드러진 특색이다. 그 이전까지 예술은 교회와 수도원, 왕족과 귀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다면, 낭만주의는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가 자신을 위한 예술이 되기에 이른다. 통상 우리가 예술가의 전형이라고 부를만한 예술가의 탄생도 바로 낭만주의로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와 비슷한 시기에 오늘날 미술을 말하는 순수미술 즉 파인아트(fine art)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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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낭만주의의 대가들인 들라크루아와 제리코의 작품은 어떠한가? 우선 그것은 "보기에 좋더라"는 아폴론적 미술이 아니다. 움직임이 많고, 구도가 역동적이고, 색채도 정연하지 않고 현란하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전쟁과 혁명, 사냥과 학살같은 드라마틱한 사건사고를 그린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키오스섬의 학살>, <사르나다팔의 최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거의 다큐멘터리식으로 보고하는 동시에, 그 사건사고에 대한 예술가의 극한 감정을 담은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죽은 거지와 부랑아와 같은 소외계층의 삶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디오니소스가 소외된 여자들을 불러내 그녀들을 위로했던 바카스 축제와 유사하다. 이처럼 미술에 있어서 디오니소스적 미술은 낭만주의미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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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반 고흐가 디오니소스적인 광기의 예술가이기만 했다면, 죽기 바로 몇 년 동안 그려냈던 수백점의 작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하건대, 반 고흐의 그림은 여느 노동자보다 오랜 시간 철저하게 일했던 화가의 것이며, 더군다나 미치광이의 그림이 아니다. 반 고흐가 귀를 자를 정도로 감정의 극한을 오르내렸다 하더라도, 그가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온전한 제 정신이었다. 아니 단순한 맨 정신이 아닌, 자신을 괴롭힌 꽤 커다란 내면적인 절망을 끈질기게 이겨내려고 했던 한 인간의 형형한 정신이라는 의미다.
그가 그린 귀를 붕대로 감싼 자화상을 보라! 그 그림이 어찌 미친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반 고흐의 어떤 그림에서도 포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오직 희망과 힘, 의지가 보일뿐이다. 어떠한 중대한 위기를 겪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자화상을 그렸던 그는 외려 정신이 온전하고 자제심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반 고흐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오히려 자신의 광기와 고독을 잠재우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 고흐의 자화상은 모두 구원받은 자기자신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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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반 고흐, 카라바조, 잭슨 폴록, 베이컨 등 언뜻 디오니소스적으로 보이는 예술가들조차 사실 작업태도나 방식은 아폴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조울증자가 울증상태의 네거티브한 극한 감정의 상태를 조증인 상태에서 활력있는 것으로 변모시키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사에 남은 수많은 매스터(Master)급 예술가들은 디오니소스적인 동시에 아폴론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미술에서는 이제 더 이상 이런 구분이 유효하지 않다. 현대의 많은 성공한 예술가들을 보면, 예술가의 전형이 달라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만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때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성을 유혹하는 아프로디테와도 같고, 때로는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신의 반열에 오르려는 영악한 헤르메스와도 같다. 이 신, 저신 조금씩 맘대로 벤치마킹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신, 저 신, 필요할 때마다 다른 신을 불러내는 저 영악한 예술가들은 과연 우리를 얼만큼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쩐지 회의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우리가 예술가의 전형으로 바라보던 반 고흐와 세잔느, 모딜리아니, 클림트 같은 화가는 더 이상 만나보기 힘든 것일까? 아직도 예술가들의 순정을 기대하는 것은 진짜 진짜 시대착오적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