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티브시니어시대②] 하이힐 신고 카메라 든 '은발의 청춘들 현장

양승준 기자I 2013.09.27 14:56:34

60세 모델
"워킹하니 굽은 허리도 꼿꼿해져
다음달 독일로 패션쇼 떠난다우"
70세 방송기자
"촬영·편집 척척…영화제 출품도
스마트 문맹? 포토샵은 기본!"

영상 편집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은 차경미·최성일(위) 씨와 카메라로 촬영 중인 사공남규(아래) 씨(사진=김정욱 기자 98luke@).


[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나이는 숫자일 뿐”은 헛된 말이 아니다. ‘어모털리티’(A-mortality) 시대다. 죽을 때까지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이 늘었다는 소리다. 그 중심에 액티브 시니어가 있다. 경제적 여유와 교육적 혜택을 누린 신노인족은 ‘젊어졌고 똑똑해졌다’. 학구열도 높다. 한국방송통신대에 따르면 올해 등록생 중 60~75세 비중이 2007년에 비해 3배가 늘었다. 문화를 즐기려는 의지도 강하다. 클래식 같은 교양 얘기가 아니다. 춤에서부터 영화제작까지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뛰어든다. 디지털기기를 활용해 창작자로 나서기까지 한다. 지난 4월 열린 ‘제3회 올레 국제스마트폰영화제’에는 50대 이상의 지원자 수가 0.4%에 달했다. 요즘 신노인족은 어떻게 노년을 즐기고 있을까. 그 파격적인 문화 현장을 직접 가봤다.

▶‘실버 이소라’ 독일 가는 시니어 모델

다홍색 원피스에 굽 높은 흰색 구두. 레드카펫을 걷는 여인의 걸음이 당당하다. 주인공은 바로 허미숙(60) 씨. 노부인은 무대에 서면 나이를 잊는다. 무대에서 내뿜는 카리스마는 20대 전문 모델 못지 않다. 공무원 출신인 허씨는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환갑에 시작한 두 번째 삶이다.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지난 7월 시니어 모델교실에 등록했다. 허씨는 “젊었을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했다. 노모델은 10월 꿈의 무대를 앞두고 있다. 독일 베를린 등 4개 도시에서 순회 패션쇼에 나선다. 프랑크푸르트 한국총영사관과 재독 민간단체들의 초청을 받아 이뤄진 무대다. 45명의 시니어 모델의 생애 첫 해외 패션쇼다.

별나서가 아니다. 허씨처럼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서울 삼성동과 성북동에 따로 위치한 뉴시니어라이프를 찾는 사람은 250명이 넘는다. 고교 교사부터 공기업 임원 출신까지 다양하다. 회원들 대부분은 60대지만 70대는 물론 80대도 적잖다. 50대면 ‘젊다’는 소리를 듣는다. 경북 김천이나 전북 전주에서 오는 사람도 있다.

곧 있을 해외 무대 준비에 연습실 열기는 뜨거웠다. 코치의 지도를 받고 자세를 교정하는 시니어 모델들의 눈이 빛났다. 주위 눈치를 보지는 않았을까. 손주 양육 얘기를 꺼내자 시니어 모델들은 “지들(자식들)이 알아서 키워야지”라고 입을 모았다. 취미활동을 통해 얻은 건 “자신감”이라고 했다. 마포에 사는 원종순(72) 씨는 “젊어서 입던 옷 다시 꺼내 입고 나설 때면 흥도 나고 다시 나를 찾는 것 같더라”며 “허리도 굽었는데 워킹 연습을 하면서 꼿꼿해지고 삶의 활력도 찾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공기업에서 퇴직한 최석준(57) 씨는 “그간 너무 치열하게 살았다”며 “이제는 하고 싶은 일 하며 인생의 긴장을 놓고 즐기고 싶다”며 웃었다. 연습실 중앙 벽면에는 석양사진이 크게 붙어 있었다.

구하주 뉴시니어라이프 대표는 “여행을 하며 떠오르는 태양보다 지는 태양이 멋있다는 걸 깨달았다”며 “100세 시대다. 기존의 노인의 창을 벗어나야 한다. 실제 많이들 변했다. 한 세상을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려는 의지도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실버 모델의 꿈을 키워가는 신노년들. “내 생활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는 송금호(맨 오른쪽) 씨는 시니어 광고모델이 꿈이다(사진=권욱 기자 ukkwon@).


▶“내가 PD다” 스마트 시니어


‘윤 PD’ ‘차 기자’. 노트북이 놓인 책상 사이로 일정 조율을 재촉하는 얘기가 오갔다. 한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촬영일지를 작성했다. 맞은 편에 앉은 이는 대본 수정에 바쁘다. 방송사 풍경이 아니다. 서울 역삼동 강남시니어플라자 4층 해피미디어실. 20명 노인들이 모여 방송제작을 준비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67세. 촬영부터 편집까지 직접 해결한다. 스마트폰 사용법을 설명하는 영상부터 단편영화까지 만들었다. 오는 30일 시작될 제6회 서울노인영화제에 ‘징검다리’란 작품도 출품했다. 노인의 우울증을 다룬 영화다.

“지금 렌더링(rendering·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컴퓨터에서 재생할 수 있는 파일로 만드는 과정) 중이니까 잠시만.” 백발의 차경미(66) 씨는 ‘편집의 달인’으로 통한다. “프리미어 CS 5.1을 쓴다.” 편집 관련 어려운 용어도 막힘 없이 쏟아냈다. 모두 독학으로 배웠단다. “요즘 컴퓨터 관련 책이 얼마나 쉽게 나오는데요.” 차씨는 광고회사 다니는 아들에게 컴퓨터 편집작업 과정을 알려주기도 한다. 스마트 문맹? 무시했다가 큰코 다친다. 차씨 외 다른 시니어 영상 제작 단원들에게 포토샵 등을 다룰 줄 아느냐고 물었다가 코웃음만 샀다. “다들 돌아가며 편집하는데 포토샵은 기본이지, 아이고.” 이들 모두 스마트폰 사용자다. 연락은 주로 카카오톡 상에서 이뤄진다. 영상제작 방법은 서울방송고교에 가서 배웠다.

왜 방송제작을 시작한 걸까. 최정원(61) 씨는 “지금은 멀티미디어 시대”라며 “감각적인 시대를 살며 영상으로 뭐든 제작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직 교사 출신인 최성일(68) 씨는 “내가 제작한 콘텐츠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고 답했다. 고충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해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긴장해 촬영 중 헛구역질을 하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존재감을 느낀다”는 희열이 더 컸다.

육순규(65) 씨는 “두 손주를 키우다가 아이들에게 뭐라도 가르쳐줘야겠다는 생각에 컴퓨터를 배웠고 방송제작까지 참여하게 됐다”며 “젊은 사람들처럼 빠르게는 못하지만 나 스스로 제작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웃었다. 내년에는 올레국제스마트폰영화제 등을 두드려 볼 생각이다. 이들의 팀장인 유정순(61) 씨는 “계속 교육을 받아 세상 소통의 다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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