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금융계에서도 생소한 `서브프라임`이라는 단어가 화두로 등장했을 무렵. 각국 정책 당국자, 경제 전문가들은 "서브프라임은 미국 경제 중 일부 부동산 시장에만 국한된 문제"란 입장을 고수해왔다.
서브프라임이 주식이나 외환과 같은 금융시장, 혹은 실물 경제 전반에 끼칠 영향력은 낮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국경을 넘어 전파될 가능성을 거론하는 사람은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그로부터 반년 뒤. 이제 서브프라임은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괴물로 변신했다. 미국의 베어스턴스를 시작으로 호주 맥쿼리, 유럽 BNP 파리바가 휘청였고 아시아 각국에서도 심심찮은 불안 조짐을 감지할 수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같은 서브프라임 전염이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금융상품 구조가 복잡해지고 정교해질수록 각 투자자산 간 동조화도 심해지고 글로벌 금융시장의 상관관계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금융시장 급등락과 경제 전반의 펀더멘털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잃은 지 오래다. 관련기사 ☞ "자산시장 골디락스, 종료 임박했다"-FT
바야흐로 서브프라임 후폭풍을 세계 금융시장이 같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사태가 도래했다.
◇미국 발 서브프라임, 유럽 넘어 아시아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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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자본이 인수한 첫 일본은행인 신세이 은행은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손실이 3000만달러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미국 모기지 관련 증권 보유액이 1분기 순이익의 배가 넘으며 이중 25%가 위험도가 높은 자산이라고도 공개했다.
일본 최대 증권회사 노무라 홀딩스도 1분기에 서브프라임 관련 손실이 312억엔(2억6200만달러)라고 공개했다.
싱가포르 2위 은행인 유나이티드 오버시즈 뱅크(UOB)도 6월 말 현재 자산담보부증권(CDO)에 투자해 3400만싱가포르달러(2240만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7월 한 달간 1500만싱가포르달러의 추가 손실이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했다.
태국 중앙은행도 태국 시중 은행 4곳이 CDO에 7억1500만달러를 투자했다고 공개했다.
미국 경제주간지 배런스는 지난달 말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로 미국 경제가 일시적으로 주춤했던 `아시아 독감(Asian Flu)`이 미국 발 악재에 아시아가 전염되는 `미국 독감(American Flu)`으로 변모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선진국 금융기관이 금융 위기 발생 시 일단 신흥시장 투자자금부터 회수한다는 것은 정석 중의 정석이다. 이를 감안할 때 선진국 발 악재로 인한 이번 사태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신흥 시장에 더 많은 충격을 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우량 비우량도 구분없다..우량 모기지-금융기관도 타격
서브프라임 허리케인 앞에서는 우량과 비우량 모기지, 우량과 비우량 금융기관의 구분도 별 의미가 없다. 서브프라임 대출자들의 채무불이행 비율이 높아질 무렵만 해도 서브프라임 바로 윗 단계인 알트 에이, 신용도가 높은 프라임 시장에 이 충격파가 닥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틀 전 미국의 알트 에이 모기지업체인 아메리칸 홈모기지(AHM)가 유동성 부족으로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아메리칸 홈모기지는 지난 4월 파산한 뉴센추리 파이낸셜과 달리 서브프라임 대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파산보호 충격은 컸다.
알트 에이로 전염된 서브프라임은 이제 프라임 시장마저 노리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7일 서브프라임 여파로 프라임(우량) 모기지 금리도 상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용도가 높은 사람들이 고가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 이용하는 이른바 `점보(Jumbo)` 프라임 모기지의 30년 고정금리가 지난달 중순 6.5%에서 7.34%로 급등한 것.
미국 최대 모기지 금융업체로 서브프라임 대출을 많이 취급하지 않는 컨트리와이드 파이낸셜도 전례없는 이번 사태로 조만간 자사의 대출 여력이 소진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변화가 너무 빨리 일어나고 있어 회사가 어떤 영향을 받을지 확신할 수도 없다며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점만 분명하다"는 우울한 고백을 내놨다.
이번에 환매를 중단한 BNP 파리바의 3개 펀드도 모두 서브프라임이 아닌 우량 모기지에 주로 투자해왔지만 화를 피하지 못했다. 2주 전 BNP 파리바의 최고경영자는 우수한 2분기 실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서브프라임 걱정이 없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불과 2주 만에 최고경영자가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급변해버린 셈이다.
금융기관의 명성도 서브프라임이 몰고 온 신용 위기 앞에서 빛이 바랬다. 엄청난 수익을 내며 월가 투자은행의 최고봉으로 군림해 온 골드만삭스 역시 산하 헤지펀드의 청산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버냉키-폴슨-오닐은 틀렸다" 지적도..금융거물 명성 흠집
서브프라임 사태는 국제 금융계를 주름잡는 주요 인사들의 명성에도 흠집을 남겼다.
블룸버그의 밥 아이브리 칼럼니스트는 이날 "이번 사태로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 스탠리 오닐 메릴린치 최고경영자(CEO) 등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잘 알려진대로 버냉키 의장과 폴슨 재무장관은 서브프라임 사태가 수면 위로 등장한 후 줄곧 미국 경제의 건강성을 강조해왔다. 버냉키가 폴슨의 경우 정부기관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모범답안을 말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지만 메릴린치의 오닐은 사정이 다르다.
오닐은 지난 4월부터 줄곧 "서브프라임 발 위기가 과장된 것이며 부실이 전염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오닐의 경쟁자인 골드만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페인 CEO 역시 비슷한 입장을 취했지만 이번 사태로 그들의 발언 신뢰도가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반면 이 와중에 주목받고 있는 인물들도 있다.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 채권왕 빌 그로스 핌코 회장 등은 꾸준히 서브프라임이 매우 위협적이라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아이칸은 "서브프라임 여파로 사모펀드 업계의 수익 악화가 불가피하다"고 말한 바 있다. 빌 그로스 핌코 회장은 "서브프라임 부실이 소비를 포함한 미국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FRB가 빨리 금리인하를 단행해야 한다"고 줄곧 외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