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김수헌기자] 지난 92년 어느날 LG그룹 계열 A사 사장이 당시 구자경 회장을 찾아왔다. 그는 "그룹 내 B사가 그동안 A사에 발주해주던 물량을 아무런 통지없이 외부업체에 맡겼다"며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 회장이 B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대답은 이랬다.
"구 회장이 추진하고있는 전문경영인 자율경영 체제하에서 경영에 관한 의사결정 전권은 사장이 갖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공급선을 결정하는 것도 사장 권한이다. 외부업체를 선택한 것은 비록 규모가 작긴 하지만 그룹 내 A사보다 전문성이 뛰어나고 계약조건도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룹사라고 `떼놓은 당상`아니다
구 회장은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A사 사장에게 "그룹 내 회사간에도 공급자와 고객 관계가 있다. 공급자가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면서 고객으로부터 사업기회를 확보하려고 노력해야지 같은 그룹사라고 해서 `떼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니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구 회장은 일찌감치 그룹 자율경영체제 확립을 추진해 왔고, 전문경영인들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율체제 정립 뒤 원칙을 한가지 정했다고 한다.
그룹 내 거래에서도 어떠한 기득권을 인정하지 말고 공개경쟁원칙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것. 구 회장은 그룹 중역들에게 "A사, B사 같은 일을 당하면서 웬만하면 관계사들끼리 거래하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자율경영 원칙을 무너뜨리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에 참았다"고 말했다 한다.
LG 관계자는 "오래전부터 오너들이 전문경영인을 사업 파트너로 생각하고 자율경영을 통해 능력을 발휘하도록 지원해 왔다"며 "재벌기업이라고 하면 서로서로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거래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그룹 전체를 갉아먹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구본무 회장, A그룹 중역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다
재계에 회자되는, 그러나 확인되지는 않은 이야기를 하나 있다. LG그룹 구본무 회장이 최근 러시아 한 호텔 로비에서 계열사 중역들과 있다가 A그룹 임원들과 맞닥뜨렸다. 구 회장을 알아본 A그룹 임원들이 다가와서 인사를 하며 명함을 내놓자 구 회장도 자기 명함을 A그룹 임원들에게 건넸다.
그때 뒤늦게 나타난 A그룹 회장이 이 모습을 보고 임원들을 꾸중했다고 한다. 구 회장과 명함을 맞교환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
예의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중요치않다. 구 회장의 이같은 행동이 전문경영인들에 대한 오너의 예우를 느끼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구 회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이고 구 회장 위치로 보아 A그룹 중역들의 명함을 받는 것만으로도 서로 인사는 한 셈이다. 그러나 구 회장이 직접 자기 명함을 건네줬다는 작은 사례에서도 LG그룹의 오너와 전문경영인간 관계, 그리고 자율경영시스템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재계의 평가다.
◇루퍼트 머독의 불안, 그리고 `포이즌 필` 동원
그동안 재벌은 총수가 모든 중요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황제경영 시스템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물론 일부에서 과거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상당수 재벌들은 자율경영, 책임경영, 성과주의 경영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사회공헌 경영까지 덧붙여졌다.
얼마전 공정거래위원장은 "재벌들이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복잡한 의결권 승수 개념을 도입해 소유권과 지배권만을 따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들이 적대적 M&A와 경영권 방어를 걱정하고 있는데도 금융사 의결권을 좀 더 제한하겠다고 밀어붙이는 것은 과하다는 지적도 많다.
얼마전 신문에 `미디어의 황제`로 불리는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 자사 경영권을 빼앗길까봐 걱정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머독 회장이 적대적 M&A 시도를 막기 위해 `포이즌 필(Poison Pill)` 처방을 내렸다고 한다. 이것은 증자를 할 때 기존 주주에게 신주를 싼 값에 주거나 임직원들의 임금을 높이는 방식으로 인수비용을 높여 적대적 M&A를 막는 것이다. M&A 방어수단이면서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극약처방`으로 불린다.
머독의 이같은 조치는 미디어투자업체인 리버티미디어가 뉴스코프 지분을 9%에서 17%로 늘리기로 했다고 한 발표 때문이다. 단지 지분을 늘리기로 했다는 발표에도 대응하기 위해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다.
그렇다면 머독 회장 일가의 뉴스코프 지분이 얼마나 취약하길래 이러는 것일까. 월스트리트저널은 전문가들의 언급을 인용 "머독 일가의 지분이 30%에 `불과`하기 때문에 뉴스코프가 적대적 인수위협에 노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화학비료 써서 땅 망치지나 않는지 살피는 게 구조본"
`불과` 30%라고 했다. 우리 기업은 이보다 훨씬 열악한 지분조건에 처해 있는 곳이 많다. 그래서 금융사 지분규제를 할 경우 적대적 M&A에 노출될 수 있다고 호소해도 정부에서는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라고 한다.
정부에서는 삼성그룹의 구조조정본부를 문제삼은 적이 있다. 요새는 뜸하지만 한때는 자주 도마에 올랐었다. 삼성은 `회장-구조본-계열사 전문경영인`이라는 `삼각편대`가 그룹의 뛰어난 성과를 뒷받침하는 주역이라고 설명한다. 구조본은 일종의 `조기경보기`로서, 고공에 떠서 계열사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잡아내 리스크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삼성그룹 비서실은 과거 각사의 의사결정에 일일이 관여하기도 했다. 그룹 관계자는 "그때만 해도 각사가 독립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지금은 훌륭한 CEO와 우수한 인재들이 많아 경영이 시스템에 따라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구조본이 각사 경영에 끼여들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학수 구조본부장의 표현에 따르면 `각사가 당장에 소출을 늘리겠다며 화학비료를 써서 좋은 땅을 망치지는 않는지 살펴보고, 좀 힘들더라도 퇴비를 쓰도록 권장`하는 정도가 구조본의 역할이다.
◇생존 위한 왕도없다..이사회 중심경영 실천하자
이사회 중심경영에 대한 오너의 생각도 확고해져 가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최근 계열사 팀장급을 대상으로 한 SK경영시스템(SKMS) 교육에서 "이제 이사회 중심 경영은 싫다고 거부할 수 없으며,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왕도가 없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그래서 예전부터 이사회 중심경영을 강조해 왔었다"며 "예를 들어 영어는 이미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되었으며, 내가 싫다고 영어공부 안 할 수 없듯이 이사회 중심 경영을 우리는 준비해온대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