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언백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제주, 호는 해장(海藏)이다. 함경도 북병영과 평안도병사에서 군관을 지내는 동안 북방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명성을 날렸다. 이후 평안도 의주 청성만호, 선공감주부 등의 관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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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이 왕릉을 침범하는 일이 생기자 장군은 의병을 모집해 경기도 일대 능침을 보호했다. 특히 태릉(문정왕후의 능)과 강릉(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을 보호한 공적으로 가의대부(종2품)에 승급됐다.
1593년 1월부로 경기도방어사와 경상좌병사를 겸임한 장군은 조명 연합군에 배속돼 벽제관 전투에 참전해 왜군 100여 명을 사살했다. 행주대첩 이후 권율 장군의 지휘에 따라 양주 해유령에 주둔하면서 평양과 함경도에서 후퇴한 왜군을 차단시키는 공을 세웠다.
또 도원수 김명원, 승군 유정 등과 함께 노원평 일대 험준한 산에서 복병하고 있다가 기습작전으로 왜군을 대거 소탕해 한양 수복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전투가 ‘노원평전투’다. 행주대첩에 버금가는 중요한 전과로 기록됐다. 노원평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은 이후에도 왜군을 쫓아 남하했으며 삼도방어사가 돼 경남 함안·합천, 경북 경주에 주둔하며 끊임없이 왜군과 싸웠다.
1597년 경상도방어사에 임명돼 경북 의성, 성주, 울산 등지에서 주둔했다. 울산 서생포에 있던 가토 기요사마와 모리 요시나리 군대의 침입을 격퇴했다.
왜란이 끝난 뒤 장군은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봉해지고 ‘제흥군’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이 역모죄로 몰렸을 때 그의 심복으로 지목돼 곤장형을 받다가 사망했다. 그의 공적도 함께 삭제됐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관작이 회복되고 병조판서(정2품)에 추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