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정재웅기자]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국내 조선업계에 요즘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배를 수주해 놓고도 만들지 못하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중소형 조선업체들 이야기입니다. 금융권이 향후 2~3년 뒤엔 조선경기가 꺾일 것을 우려, 중소 업체들에겐 자금지원을 꺼려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대형조선업체들의 '호황'에 환호하고 있을때 그들은 그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중소 조선업체들의 현실을 산업부 정재웅 기자가 짚어 봤습니다.
C&그룹이 계열사인 신우조선해양을 매각할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소식에도 업계에선 그다지 놀라지 않습니다. 그저 '올 것이 온 것 뿐'이라는 분위기 입니다. 조선업계 내부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셈입니다.
신우조선해양은 지난해 11월 C&그룹이 총 325억원을 들여 인수한 회사입니다. C&그룹은 최근 조선업을 그룹의 핵심사업으로 꼽고, 철강업을 매각해 조선업에 투자키로 하는 등 조선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지난해 C&그룹이 신우조선해양을 인수할 때만 해도 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업이 워낙 호황이다보니 C&중공업이 보유하고 있는 목포 조선소에 이어 신우조선해양을 통해 거제도에도 조선소를 건립, C&그룹의 제2 조선소를 완성한다는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C&그룹은 그 꿈을 거제도 앞바다에 고스란히 묻어두게 생겼습니다. 금융권을 중심으로 중소형 조선소에 대한 대출이 거부되면서 이같은 계획이 물거품이 됐기 때문입니다.
당초 지난 4월 완료를 목표로 했던 부지매립은 아직도 진행 중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번 매각이 성사돼도 조선소를 매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소 부지를 매각하는 셈입니다. 그나마 새주인으로 누가 나설지도 불확실한 상태입니다.
이런 예는 비단 C&중공업 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조선업 호황을 틈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국내 중소형 조선소들은 하나같이 '배를 수주해 놓고도 못만들고 있는' 현실에 처해있습니다.
어떤 업체는 아예 대형 조선업체에서 사흘에 한번 꼴로 실사를 오는 등 매각만 기다리는 형국입니다. 그 사이 중소 조선업체 직원들은 모두 인근의 대형 조선업체로 자리를 옮기는 '엑소더스'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이는 그동안 잠재돼있던 중소형 조선소들의 자금난이 이미 감당할 수 없을만큼 심각한 수준까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신우조선해양을 시작으로 향후 몇년간 중소형 조선소들은 심각한 구조조정을 겪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현재 국내 중소형 조선업체들의 경우, 대형 조선업체와 달리 대부분 선박가격이 싸고 건조가 쉬운 벌크선 건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중소형 조선소들은 대형 조선업체처럼 높은 기술력이 없어 한번 건조하면 같은 도면으로 계속 비슷한 형태의 선박을 건조해낼 수 있는 벌크선에 집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많이 만들어야 이윤이 많이 남는 구조인 셈입니다.
또 많이 만들기 위해선 그만큼 설비가 갖춰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하고 거기엔 엄청난 자금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최근 조선경기가 향후 2~3년 뒤에는 꺾일 것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금융권에서 자금사정이 탄탄하지 못한 중소형 조선소에 자금대출을 꺼리기 시작했습니다.
금융권에선 "미래가 불확실한 중소형 조선소에 돈을 빌려줬다가 떼이면 누가 책임질거냐"면서 대출창구를 닫아버렸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금융권의 입장에선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느니 탄탄한 대형 조선업체에 투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런지 모릅니다.
하지만 닫혀버린 금융권의 대출창구 앞에 선 중소형 조선업체들은 절망입니다. 당장 선주사들에게 넘겨야 할 배는 계약해 뒀는데 그 배를 만들 돈이 없으니...
그래서 중소 조선업체들은 가지고 있는 자산 매각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숨통 트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궁지에 몰린 중소 조선업체들은 선박을 수주하면서 금융권에서 받아야 하는 리펀드개런티(RG:조선업체가 배를 완성할때까지 금융권에서 선주에게 서는 일종의 보증)조차 받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제1 금융권 보다는 비교적 쉽게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제2 금융권의 문을 두드렸고 이 과정에 브로커가 개입, 사기를 당하는 일까지도 생겼습니다.
사정이 이렇자 중소형 조선소들은 자포자기 심정이라 합니다. 이젠 차라리 대형 조선업체들이 나서 중소 조선업체들을 흡수해주기를 바라는 실정입니다.
한 중소형 조선업체 고위 관계자는 "금융권이 중소형 조선업체들에 대해 등을 돌리면서 중소형 조선업체들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수주량이 폭주하고 있는 대형 조선업체에서는 야드가 부족해 중소형 조선업체를 M&A하는 데 관심이 많다"고 전합니다.
그는 "우리 같은 중소형 업체는 대형 업체와 달리 가격이 싸고 건조가 쉬운 벌크선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기술을 요하는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와는 거리가 멀다"며 "따라서 대형업체와는 차별화된 전략으로 중국이 가져가려는 벌크선을 우리가 빼앗아 오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경쟁하려는 것은 대형 업체가 아니라 중국 업체들"이라면서 "금융권에서 좀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조선업을 바라보고 우리가 애써 빼앗아온 벌크선 시장을 중국에 다시 돌려주는 일이 없도록 해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습니다.
담배를 끊은지 올해로 꼭 10년째라는 이 관계자는 최근 들어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그저 위안이 되는 것은 담배뿐"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한숨과 함께 뿜어내는 담배연기 속에는 우리나라 중소 조선업체들의 시름이 가득 담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