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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런히 움직이느라 나이 먹는걸 잊었지라 [강경록의 이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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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록 기자I 2026.09.11 05: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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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의 고장' 전남광주 고흥을 가다
아흔살 넘어도 정정한 어르신들
탁구장·컴퓨터실·실버카페 북적
비결 묻자 규치적 생활·교류 꼽아
"제때 먹고 배우고 만나고, 별거 있나"
인근에는 팔영산 편백 치유숲 울창
촘촘한 일상 속 고요한 쉼표 선사해

[고흥(전남광주)=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지도에서 고흥 반도를 짚어보면 육지의 끝자락이자 바다의 시작점이다. 세월마저 비켜갈 듯 아득한 이 남녘으로 들어서는 길목, 고요하리라 여겼던 시골 마을의 아침은 뜻밖의 활기로 가득했다. 복지관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탁구공 소리부터 거친 바닷가 일터로 나서는 어르신들의 부지런한 발걸음까지, 조용한 시골 마을일 거라는 바깥사람들의 편견을 깨부수듯 맹렬한 삶의 현장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고흥읍내 중심부에 자리한 고흥군 노인복지타운의 구내 식당은 균형잡힌 식단으로 어르신들의 건강을 챙기고 있다.
고흥읍내 중심부에 자리한 고흥군 노인복지타운의 구내 식당은 균형잡힌 식단으로 어르신들의 건강을 챙기고 있다.
사실 이 남쪽 반도로 발길을 이끈 것은 정부의 한 조사 발표 내용이었다.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주택총조사 100세 이상 고령자조사’(2025년)에서 고흥은 전국 기초지자체 중 인구 대비 100세 이상 고령자가 가장 많은 곳으로 나타났다. 고흥의 100세 이상 고령자는 인구 10만 명당 91.8명으로, 전국 평균(17.3명)의 5배를 훌쩍 넘는 압도적인 수치다.

거창한 장수의 비약이나 특별한 비법이 숨어 있는지, 아니면 진짜 고흥 사람들의 하루가 도시인들과 다른지 확인하고픈 마음에 남쪽 끝 반도로 향했다.

고흥군노인복지관에서 만난 김성식(94), 이영두(90) 어르신은 장수의 비결로 특별한 비법이 아닌 평범하지만 규치적인 생활을 꼽았다.
고흥군노인복지관에서 만난 김성식(94), 이영두(90) 어르신은 장수의 비결로 특별한 비법이 아닌 평범하지만 규치적인 생활을 꼽았다.
어르신들의 아침을 채우는 규칙적인 일과

먼저 고령의 어르신들을 만나러 고흥읍내 중심부에 자리한 고흥군 노인복지타운으로 들어섰다. 공립 노인전문요양병원과 요양원, 치매안심병원까지 모여 있는 이곳의 중심에는 늘 어르신들로 북적이는 고흥군노인복지관이 있다. 복도 곳곳에는 촘촘하게 짜인 요일별 프로그램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탁구장과 건강운동실에서는 연신 경쾌한 마찰음과 어르신들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2층 ‘고흥실버카페(H-Life)’ 안에는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이곳에서 만난 김성식(94·사진) 어르신은 꼿꼿한 허리선에 모자를 단정히 쓴 채 의자에 바르게 앉아 있었다. 연세를 가늠하기 힘든 단단한 목소리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에게 장수의 비결을 묻자, 잠시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하게 답을 내놓았다.

고흥읍내 중심부에 자리한 고흥군 노인복지타운의 구내 식당은 균형잡힌 식단으로 어르신들의 건강을 챙기고 있다.
고흥읍내 중심부에 자리한 고흥군 노인복지타운의 구내 식당은 균형잡힌 식단으로 어르신들의 건강을 챙기고 있다.
“평상시에 항상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에 난 그런 걸 유지한다고 그러것지라.”

특별한 보양식이나 건강기능식품은 없었다. 밥도 많이 먹지 않는다고 했다. “양은 제가 많지는 않소만, 그래도 끼니는 때를 맞춰서 허지라.” 식탐을 부리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소식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규칙이었다.

예상치 못한 평범한 비결에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곁에 있던 이영두(90·사진) 어르신이 덤덤히 자신의 하루 일과표를 꺼내놓았다. 그의 하루는 아침 8시 복지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시작된다. 오전 내내 탁구를 한 시간 치며 땀을 흘리고, 일주일에 두 번은 두 시간씩 모니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컴퓨터를 배운다. 요가가 있는 날에는 한 시간 반 동안 몸을 풀며 유연성을 다진다.

이영두 어르신은 손가락으로 시간을 정확하게 짚어가며 일정을 설명했다. 나이가 들면 할 일이 없어 시간이 남을 거라는 건 편견이었다. 배워야 할 것,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시간, 만나야 할 사람들로 그들의 하루는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혹여나 고흥의 특별한 해산물이나 특산물을 많이 먹는 게 비결일까 싶어 물으니, 두 노인보다 한참 어린 80대 노인이 곁에서 무심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라제, 우리 논밭에서 난 것들이랑 바다에서 난 것들이랑 우리 몸에 딱 들어맞는 천생연분이제, 안 그랑가”

전남 고흥 팔영산 편백 치유의 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객(사진=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전남 고흥 팔영산 편백 치유의 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객(사진=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32만 그루 편백나무 숲이 품은 치유의 시간

특별한 약재 대신 제 땅에서 난 음식을 먹고, 매일 정해진 시각에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것. 그것이 고흥 어르신들이 말하는 삶의 전부였다. 복지관을 나와 고흥반도 동쪽, 영남면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일렁이던 남해 바다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더니, 이내 30년 넘은 편백나무 32만여 그루가 산자락을 빽빽하게 메운 팔영산 편백 치유의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에서 내려 치유의 숲 산책로로 걸어 들어갔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곧게 뻗은 편백나무 사이로 짙은 피톤치드 향이 훅 끼쳐왔다. 가파르지 않게 조성된 굽이치는 흙길을 따라 사람들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머리 위로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사각거림 외에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전남 고흥 팔영산 편백 치유의 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객
전남 고흥 팔영산 편백 치유의 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객
숲 한쪽에 들어선 산림치유센터에서는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운영 중이었다. 전문 산림치유지도사와 함께 전용 스틱을 짚고 숲길을 걸으며 바른 자세를 정립하는 노르딕 워킹부터 편백나무 아래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숲 명상 체험이 이어진다. 실내 센터로 들어서면 따뜻한 편백나무 탕에 발을 담그는 족욕과 원적외선 반신욕, 온열 테라피 등 수(水)치유와 열치유 프로그램이 방문객들을 맞아준다. 숲길 산책으로 자극받은 근육을 풀어주고 체온을 올려 면역력을 높여주는 구성이다. 아침 일찍부터 복지관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던 어르신들의 시간과는 또 다른, 느리고 묵직한 자연과 치유의 시간이 그곳에 고여 있었다.

전남 고흥 팔영산 편백 치유의 숲을 산책하고 있는 여행객
전남 고흥 팔영산 편백 치유의 숲을 산책하고 있는 여행객
거친 바닷바람 뚫고 일터로 나서는 단단한 일상

숲의 정적을 뒤로하고 산길을 내려가자 다시 붉은 황토와 푸른 바다가 마중을 나왔다. 영남면 해안가 끝자락에 자리한 용바위 일대였다. 먼 일본 쪽으로 비켜 지나간다는 태풍의 영향 탓인지, 바다는 잔뜩 화가 난 듯 요란하게 출렁였다. 거친 너울성 파도가 해안 갯바위를 사정없이 때리며 흰 포말을 산산조각 뿜어냈다.

그 요동치는 파도 소리를 뚫고 거친 갯바위 한편에서 집게를 든 채 묵묵히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알록달록한 꽃무늬 모자에 긴소매 작업복 차림을 한 백춘자(84·사진) 어르신이었다.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해 해안가 쓰레기를 줍고 환경을 정비하고 있다는 그는 “할머니 너무 고우세요”는 기자의 인사에 환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칠 따름이었다. 미끄러운 갯바위를 능숙한 걸음으로 오르내리는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영남면 용바위 근처에서 만난 백춘자(84) 어르신은 쉼 없이 몰아치는 사나운 파도 앞에서도 제 할일을 다하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영남면 용바위 근처에서 만난 백춘자(84) 어르신은 쉼 없이 몰아치는 사나운 파도 앞에서도 제 할일을 다하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나와서 땀 흘리고 사람덜 만나고 일하는 게 그저 기쁘고 좋지라.”

평생을 이곳의 평평한 흙과 거친 바다에 기대어 살았다는 그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쉼 없이 몰아치는 사나운 파도 앞에서도 그는 제 할 일을 다하며 환하게 웃었다. 장소만 다를 뿐, 아침 일찍 복지관으로 향했던 어르신들이나 갯바위에 서 있는 백춘자 어르신이나, 고흥 반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영역에서 흔들림 없이 자기 몫의 하루를 이겨내고 있었다.

인근 미르전망대에 올라 멀어지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수평선 쪽으로 갈수록 다도해 섬들의 윤곽은 흐려지고 거센 파도 소리만 발아래를 맴돌았다. 고흥을 돌아나오는 길, 무심코 지나쳤던 마을의 작은 골목길과 논밭의 풍경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거창한 수식이나 통계 수치는 필요치 않았다. 그저 제 속도대로 묵묵히 오늘을 살아내는 단단한 일상이 남쪽 반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최근 SNS 등에서 관심을 끌면서 인기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는 전남 고흥의 우도 레인보우교
최근 SNS 등에서 관심을 끌면서 인기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는 전남 고흥의 우도 레인보우교
전남 고흥 영남면 해안가에 있는 용바위 해안은 용이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남 고흥 영남면 해안가에 있는 용바위 해안은 용이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최근 SNS 등에서 관심을 끌면서 인기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는 전남 고흥의 우도 레인보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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