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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려 도장 찍었는데 아버지 빚까지 떠안을뻔했다[판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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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현 기자I 2026.07.25 12: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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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있는 최신 판례 공부방(84)
상속 임대차 연장해 준 유족…한정승인 무력화 위기서 반전
대법 "임대차 연장은 '관리행위'…상속 재산 한도 내 책임"
상속인은 계약 조건 변동 주의, 세입자는 회수 범위 확인해야

[하희봉 로피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임대인이 세상을 떠났다. 얼마 뒤 세입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보증금 1억 6,000만 원을 돌려주든지, 어렵다면 상속인들 명의로 연장계약서를 써 달라는 요구였다. 세입자는 보증금을 전세자금대출로 마련했는데 대출 만기가 코앞이었다. 임대인이 사망해 그 지위가 유족들에게 넘어간 터라, 새 임대인인 유족들 명의의 계약서가 있어야 은행이 대출을 연장해 준다는 것이었다. 유족들은 요구대로 도장을 찍었다. 2년 뒤 연장된 기간이 만료되자 세입자는 보증금을 돌려달라며 유족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유족들은 물려받은 재산의 한도에서만 갚겠다고 맞섰다. 연장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준 유족이, 자기 재산을 털어서 보증금을 갚아야 할까?

(사진=나노바나나)
(사진=나노바나나)
대법원은 유족의 손을 들어 사건을 돌려보냈다. 이런 연장계약 체결은 상속재산에 대한 ‘처분행위’가 아니라 ‘관리행위’이므로, 한정승인의 방어막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다(대법원 2026. 5. 8. 선고 2025다220329 판결).

사연을 되짚어 보자. 세입자는 2020년 3월 집주인과 보증금 1억 6,000만 원, 월세 없는 임대차계약을 맺었다. 두 달여 뒤 집주인이 사망했고, 배우자와 네 자녀가 상속인이 되었다. 임대차 기간 만료를 앞두고 세입자는 대출 만기가 지나면 경매가 진행될 수 있다며 서둘러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자녀 중 한 명은 가정법원에 한정승인(물려받은 재산의 한도 안에서만 상속 빚을 갚겠다는 신고)을 신청했고, 바로 다음 날 상속인 전원이 종전과 같은 조건으로 기간만 2년 늘리는 계약서를 썼다. 계약서에는 이 계약이 종전 계약의 “2년 연장계약이며, 계약조건은 같다”는 것, 상속인들이 보증금을 “그대로 승계”한다는 것, 세입자의 전세대출 연장에 협조한다는 특약이 붙었다.

쟁점은 그 연장계약서였다. 민법은 상속인이 상속재산을 ‘처분’하면 상속을 통째로 받아들인 것, 곧 단순승인한 것으로 본다(제1026조 제1호). 단순승인이 되면 한정승인의 효력을 내세울 수 없으니, 물려받은 재산만이 아니라 자기 재산으로도 상속 빚을 갚아야 한다. 원심은 연장계약 체결이 바로 그 처분행위라고 보았다. 한정승인 신고 사실을 세입자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계약서까지 쓴 것은 보증금 반환채무를 자기의 채무로 떠안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고, 세입자도 상속인들이 책임지리라 믿었다는 논리다.

대법원은 달리 봤다. 목적물도 보증금도 차임도 모두 같고 기간만 늘렸을 뿐이며, 계약서 스스로 “그대로 승계”라고 밝히고 있다. 계약 체결도 전세대출을 연장하려는 세입자의 요구에 응한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는 상속재산의 현상을 유지하는 관리행위(민법 제1022조)이지, 단순승인의 뜻을 읽어낼 처분행위가 아니다. 처분행위로 보지 않아도 세입자가 뜻밖의 손해를 입지 않는 반면, 처분행위로 보면 유족이 전 재산으로 책임져 한정승인 제도의 취지에 어긋난다고도 지적했다. 특히 한쪽 당사자에게 중대한 책임을 지우는 내용의 계약일수록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강조점이다.

한정승인은 빚을 없애 주는 제도가 아니다. 빚은 전액 그대로 남되, 갚을 책임만 물려받은 재산의 범위로 줄여 주는 방어막이다. 상속재산 처분행위 한 번이면 이 방어막이 통째로 사라진다. 이번 판결은 유족이 일상적으로 하는 ‘있던 계약을 그대로 잇는 일’까지 그 함정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경계선을 그은 것이다.

상속인이라면 도장을 찍기 전에 그 서류가 없던 의무를 새로 만드는 것인지, 있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인지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에서도 ‘연장’, ‘그대로 승계’라는 계약서 문구가 유족을 지켰다. 반대로 보증금을 올리거나 새 담보를 제공하는 등 조건을 바꾸면 처분행위로 평가될 위험이 커진다.

세입자 쪽에서도 새길 대목이 있다. 임대인이 사망하면 상속인들과 연장계약을 맺더라도, 상속인들이 한정승인을 하면 보증금 회수는 상속재산 한도로 제한될 수 있다. 임대인이 사망했다면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가입 여부와 상속 관계를 확인해 두는 편이 안전하다.

그날 상속인들이 찍어준 도장은 세입자의 대출 연장을 도우려는 목적이었지, 아버지의 빚을 떠안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사건을 돌려받은 법원은 그 전제 위에서 다시 판단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족이 갚을 범위는 물려받은 재산의 한도로 돌아올 것이다.

■하희봉 변호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과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4회 변호사시험 △특허청 특허심판원 국선대리인 △(현)대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 국선변호인 △(현)서울고등법원 국선대리인 △(현)대한변호사협회 이사 △(현)로피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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