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하정민기자]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서브프라임 발(發) 신용 위기는 과거 금융 위기와 달리 선진국에서 발발, 신흥시장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이나 파급 속도도 훨씬 빠르고, 이 위기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 지 예측도 어렵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 일종의 절대 선(善)으로 추앙받았던 소위 `선진 금융`의 한계가 드러난 사건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습니다. 뉴욕 특파원으로 미국 경제를 접했다 최근 국제부로 복귀한 하정민 기자가 이에 관한 소감을 전해드립니다.
특파원으로 뉴욕에 발을 디뎠던 2년 전. 미국 생활의 필수품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해 자동차 판매점을 방문했습니다. 딜러는 할부로 차를 구입하겠다는 기자에게 대뜸 "크레딧 히스토리가 있느냐. 없으면 보증인을 구해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집도 아니고 차를 사는데 보증인이 필요하다는 것도 의아했고, 생소한 `크레딧 히스토리(Credit history)`라는 말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습니다.
크레딧 히스토리는 한 마디로 "이 사람이 돈을 빌린 후 잘 갚은 기록이 있다"는 증명을 뜻합니다. 좋은 신용 점수를 가지려면 집이나 차를 할부로 산 다음 매월 꼬박꼬박 할부금을 붓거나 신용카드를 많이 쓰면서 제깍제깍 갚아야 합니다.
1~2년을 이렇게 보내 신용 점수가 많이 쌓이면 그제서야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경제 활동이 가능해집니다. 집이나 차를 살 때,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때도 아무런 제한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크레딧 히스토리가 없으면 신용카드는 커녕 은행 직불카드조차 만들기 어려운 것이 미국의 현실입니다.
미국에 온 지 2주 밖에 안 되는 기자에게 크레딧 히스토리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보증인을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더니 딜러는 냉정하게 말하더군요. "크레딧이 없는 것(No credit)은 크레딧이 나쁜 것(Bad credit)보다 더 나쁘다. 당신이 미국에서 경제 활동을 했다는 근거가 없는데 뭘 믿고 할부를 해주겠느냐. 일시불로 차를 사든지, 높은 이율을 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적금을 깨서 일시불로 차를 살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렇게 제 속을 썩이는 크레딧 히스토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할부를 택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야 저도 신용 점수라는 것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결국 제가 감수해야 했던 이율은 무려 13.5%였습니다.
살면 살수록 미국 사회의 신용정보 관리 체계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차를 구입할 당시 보증인을 세워 낮은 할부 이율을 적용받았다면 제가 행하는 모든 경제 활동이 보증인의 신용 점수에도 똑같이 영향을 미칩니다.
하다못해 제가 몇 만원에 불과한 신용카드 대금을 연체했다 해도 저 자신은 물론 보증인의 신용 점수가 동시에 대폭 깎입니다.
차 할부금이나 신용카드 대금 연체도 물론이지만 주택담보 대출인 모기지를 연체하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모기지 연체가 몇 달 이어진다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이미 경제적으로는 파산 선고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신용 점수를 잃는 것은 잠깐이지만 그것을 복구하려면 몇 배의 시간과 돈과 노력이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반면 좋은 크레딧 히스토리를 보유한 사람들은 그 이상의 혜택을 누립니다. 모기지, 자동차 할부, 대출에서 일반인들과 상당한 격차가 나는 낮은 이율을 적용받습니다. 의사 등 일부 전문직 고소득자는 낮은 이율도 모자라 집을 살 때 내는 초기 계약금(Down Payment)까지 면제받기도 합니다. 매달 모기지만 꼬박꼬박 내면 15년 후, 20년 후 그 집이 자신의 소유가 되는거죠. 미국에 집만 서너채 가지고 있는 의사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렇듯 신용 점수에 따라 상벌이 확실한 미국 사회를 몸소 겪었던지라 최근의 서브프라임 발 신용 위기가 저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글로벌 저금리, 금융시장 및 파생상품의 급속한 발달, 국경 및 금융상품 영역 간 경계 해소 등 서브프라임 위기를 야기한 원인들은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간단합니다. 금융 기관들이 신용 점수가 낮은 저소득 대출자들에게 무분별하게 대출을 남발한 겁니다.
지난 4월 미국 모기지 회사 중 가장 먼저 파산한 뉴센추리 파이낸셜은 갚을 능력도 없고 돈을 잘 갚은 기록도 없는 대출자들에게 주택 구입 자금의 100%를 대출해주는 등 공격적 영업 방식으로 유명한 회사였습니다. 금융회사의 부실한 신용정보 관리가 얼마나 위험한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이, 신용 정보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강조하는 미국이 정작 자신의 안방에서 신용 정보를 안이하게 관리하다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괴물을 만들어낸 셈입니다.
서브프라임은 이제 우리의 위기로도 다가왔습니다. 단순히 지난 주 국내 주식시장 급락만을 거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수 년간 실물 경제의 생산성은 떨어지고 있는 반면 저금리를 바탕으로 주택담보대출이 급증, 자산시장 거품이 상당히 팽창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이은 콜금리 인상과 주택가격 안정세 등으로 채무자들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증가한 터라 한국 부동산 시장에서도 유사한 사태가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꾼 지난 1998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 `선진 금융`이라는 용어는 막강한 권력을 지녀왔습니다. 관치 금융과 부실한 운영 방식으로 얼룩진 한국 금융계가 영미권 자본으로 대표되는 선진 금융 기법을 습득해 고질적 병폐를 해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 많이 들어 식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서브프라임 사태를 지켜보노라면 과연 선진 금융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 지, 이번 사태의 해결책을 찾는 데 있어 선진국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야 할 지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흔히 선진 금융의 금과옥조로 찬양받는 복잡한 파생기법은 얼핏 보기에는 그럴싸하게 위험을 분산시키는 방식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번 서브프라임 사태로 현란한 금융공학을 총동원한 파생상품이 오히려 리스크만 확대 재생산했다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대출자의 신용 정보 관리라는 금융의 `기본`을 허술하게 해 놓고 이를 복잡한 파생상품의 유동화로 가리는 것은 리스크의 `분식회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밝혀진 거죠.
결국 금융의 선진과 후진을 나누는 잣대는 `얼마나 기본에 충실했는가`가 돼야겠습니다. 우리가 한국 경제 실정에 맞는 서브프라임 해결책을 찾을 때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안이 `기본`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