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단이 중앙은행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위기 극복을 위해 풀어놓은 돈을 거둬들일 시기를 저울질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수할 시점을 놓치면 걷잡을 수 없는 고물가 시대로 직행할 수 있고, 반대로 너무 빨리 흡수하면 살아나려던 경기를 다시 짓밟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때문에 정부나 중앙은행 모두 현재의 경기판단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일본식 장기불황에 진입하느냐,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냐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당국이나 한은은 아직까지 과잉 유동성을 걱정할 때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통화정책이 선제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고민이 깊을 수 밖에 없다.
◇ 느릿해진 `광의지표` vs 빨라진 `협의지표`..어느쪽을 볼까
단기 부동자금의 기준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현금성이 높은 실세요구불 예금, 수시입출식예금, 시장성 예금, 머니마켓펀드, 증권사 고객예탁금, 1년 미만 정기예금 등에 머물고 있는 돈은 800조원에 달한다.
통화량 지표에서도 이같은 단기자금 급증세는 확인된다. 현금과 결제성 자산을 말하는 협의통화(M1)는 지난 3월 전년동기대비 14.3% 증가해 전월 9.8%에 비해 속도를 높였다. 작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마이너스, 혹은 1~2%대 증가율에 머물다 올들어 8~9%대로 올라서더니 3월 두자리수 증가율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의 통화량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광의통화(M2) 증가율은 작년 5월 15.8%를 기록한 이후 지난 3월까지 10개월 연속 둔화세를 이어갔다.
M2는 결제성 예금과 2년 미만 예적금, 머니마켓펀드(MMF) 등이 포함돼 있어 금융권에 머물고 있는 통화량을 의미한다. 4월에는 M2 증가율이 더 떨어져 10%대 중반일 것으로 한은은 추정하고 있다.
절대적인 기준에서 통화량 증가율이 `낮다, 높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1원 공급했을 때 예금과 대출을 통해 통화가 어느정도 파생되는지를 나타내주는 통화승수를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한국이 낮은 수준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작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9배가 넘었지만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10월부터 급격하게 떨어져 3월 5.09배로 떨어졌다. 일본(M3/본원통화)은 작년 8월까지만 해도 11.8배 수준이었지만 3월 11.1배 수준까지 낮아졌다. 한국의 통화승수는 지난 3월 22배로 이들 국가보다 높은 수준이다.
여기에 경상수지 흑자로 인해 국외 부문에서 유동성이 유입되고 있고, 은행의 대출태도도 점차 완화되고 있다. 유동성 증가세가 확대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한은도 `4월중 금융시장 동향` 자료에서 "시중 단기유동성이 주식 및 채권관련 상품 등으로 분산되는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 유동성 걱정은 `시기상조`..타이밍 위해 모니터링
과잉 유동성 논란은 정부와 감독당국 안팎에서 먼저 나왔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16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800조원은 분명히 과잉유동성"이라고 진단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종창 금융감독위원장도 같은 날 "과잉유동성으로 새로운 버블과 부실자산 발생이라는 부메랑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해 우려를 부추겼다.
이에 따라 당국이 이제 유동성을 흡수하는 통화 긴축 단계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급부상했다.
이 가운데 한은이 최근 통화안정증권 일반매출을 통해 시중 유동성을 흡수하면서 더욱 힘을 실어줬다. 한은의 유동성 흡수로 통안채 발행잔액은 작년 11월 124조원에서 올해 3월말 145조원으로 늘었다.
물론 기준금리를 과도하게 밑도는 콜금리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는게 한은 설명이지만, 이제 전문가들은 금리인하 기조는 끝났다고 보고 언제 금리인상에 나설 것인가를 점치고 있다.
윤 장관이 뒤늦게 "실업률이 4%에 달하는 시점에서 통화 긴축을 검토할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 "현재로선 유동성을 염려할 상황이 아니다"라면서 진화에 나섰지만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유동성 흡수의 키를 쥐고 있는 한은은 초지일관 아직 걱정할때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12일 금통위에서도 이같은 시각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간담회에서 "과잉이냐 아니냐는 실물경제와의 관계에서 여러가지 증상과 정황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며 "아직 유동성을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이에 따라 유동성을 회수하는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본격적으로 거론할 상황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는 금통위가 "앞으로 통화정책은 당분간 금융완화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힌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도 이 총재는 "단지 단기유동성 증가율이 빠르기 때문에 금융시장이나 실물경제에 어떻게 작용할지 관심있게 지켜볼 필요는 있다"고 밝혔다.
◇ 어려운 `선제적` 통화정책
통화정책은 선제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당국의 고민은 깊다. 과잉 유동성이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까지 가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손을 써야 하는데 그 시점을 잡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사후적으로 봐도 유동성을 흡수해야 하는 정확한 시점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보면 바닥을 찍고 올라가는 터닝 포인트가 가려진다. 그러나 그 시점을 미리 감지했다고 해도 당시 돈 거둬들이기에 나섰다면 과연 바닥을 무난하게 탈피할 수 있었을까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유동성 흡수는 어려운 과제다.
이 총재는 "통화정책도 전 국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분위기를 만들고 여론형성 하고 하는 것도 관련이 있다"며 "앞으로 당장 거론하기는 이르지만 적절한 때가 됐을 때 원만하게 이뤄지도록 다같이 협력해야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