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은행공룡들`의 위기 온다..경기둔화 시한폭탄

강남규 기자I 2006.05.22 15:22:58

세계 경제 하락으로 여신 부실화 가능성커....은행가들, 거대화 득실 냉정하게 따져야

[이데일리 강남규기자] 생존을 이유로 M&A를 통해 한껏 몸집을 불려온 각국의 은행들이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은행 경영자들이 이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호황 국면을 활용한 외형 확장에서 경기침체 전망에 맞춰 위기대응 모드로 전환할 시점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사실 최근 5년 동안 세계 각국의 은행들은 보기 드문 호황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경쟁 은행을 ‘폭식(인수합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는 마치 "먼저 삼킨 경쟁은행이 다 소화되기도 전에 새 은행을 삼키는 양상"이라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21일(현지시간) 지적했다.

하지만 이제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미국과 유럽연합 등 주요 경제권의 경기가 후퇴할 가능성이 높아 최근 과도하게 제공한 여신이 부실화하는 악순환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 시중 은행들 공룡이 되다 

은행들은 호황 국면에서 과도하게 여신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경쟁 은행들을 폭식한 나머지 미처 소화하지 못해 엄청난 포만감에 시달리고 있다. 경기후퇴로 여신이 부실화할 경우 몸집이 거대해진 은행 자체가 흔들려 한 나라의 경제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어두운 시나리오가 영국과 미국 금융 전문가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실제로 각국 은행들은 경쟁적으로 몸집 불리고 있다. 한국의 국민은행이 외환은행을 흡수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합병이 이뤄지면 국민은행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은행 가운데 자산규모 면에서 최대 은행으로 발돋움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웃 일본에서는 ‘3대 메가 뱅크’가 11개 은행을 나눠 먹은 뒤 내부 통합 과정을 진행 중이다. 중국 정부는 보유하고 있는 은행 지분을 해외 금융자본에 매각하고 있다. 러시아 거대 은행들의 자산 규모는 연 30~40%씩 늘어나고 있다. 수신 확충 때문이 아니라 합병 탓이다.

미국에서는 10대 은행이 전체 은행자산의 49%(2005년 말 기준)를 통제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는 10년 전 29%와 견주면 엄청난 집중화이다.



 
 
 
 
 
 
 
 
 
 
 
 
◇ 지나친 몸집으로 `규모의 경제` 이점 사라져 

은행이 ‘울트라사우르스’ 같은 거대 공룡으로 변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합병을 지지한 쪽은 규모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일단 몸집을 불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 유럽시장에서 은행의 자산이 250억달러(약 24조원)에 이르면 규모의 경제가 주는 이점이 사라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내부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은행 자산과 조직이 방대해지는 바람에 최고 경영진이 내부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어 효율성을 갉아먹는 요인이 구석구석에 쌓여 있는 데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더욱이 거대 은행이 여수신 부문뿐만 아니라 투자은행, 보험, 투자자문, 신용카드 부문까지 아우르는 ‘금융 슈퍼마켓’으로 변신해 법규를 제대로 준수하지 못하는 사태도 발생하고 있다. 미국 시티그룹은 2002~2005년에 일련의 불법행위를 저질러,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인수합병을 중단하라고 지난해 말 지시한 바 있다.

◇ 불길한 그림자 '부동산값 하락`

세계 주요 경제권의 경기가 본격적으로 둔화할 올 하반기 이후 거대 은행들이 부실채권에 시달릴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미국 은행들은 경제가 호황이었던 지난해 기업에 상당한 여신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경쟁적으로 부동산 담보대출을 제공했다.

경기가 후퇴하고 거품 논란이 일고 있는 부동산의 가격이 급락할 경우 1980년대 중반 시티은행의 악몽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당시 시티은행은 남미 국가에 제공한 여신이 부실화하고 마땅한 수익처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세 급등을 보인 미국 주요 도시의 업무용 건물과 부동산을 담보로 많은 돈을 대출해주었다. 은행은 나중에 부동산 가격의 급락으로 파산 위기에 몰렸으나 사우디 왕실의 투자로 목숨을 부지했다.

◇ `오일달러` 풍년..역사는 반복되는가?

최근 석유가격의 급등으로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중동지역에 달려가고 있다. 도이체 방크 AG와 HSBC가 사우디아라비아에 현지법인을 신설 또는 확충하기로 한 뒤 시티은행이 사우디에 현지법인을 설치하기로 했다고 블룸버그가 20일 전했다. 시티은행은 지난 2004년 5월 합작법인 사우디-아메리칸 은행의 지분을 처분하고 철수한 바 있다. 또한 서방의 시중은행들은 금융 지식과 테크닉에 능한 아랍인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고 있다.

이는 1973~1974년과 1979~1980년 등 석유값이 급등한 시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으로 전문가들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 들이는 편이다. 당시 미국 은행들은 수익률 하락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때 맞춰 밀려드는 오일달러를 유치해 남미지역에 제공했다가 나중에 엄청난 홍역을 치렀다.

오비이락(烏飛梨落)격으로 은행들이 이번에도 오일달러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미 M&A로 자산규모가 늘면서 대출여력이 증가한 상태인데다 오일달러까지 몰려들 경우, 어떻게 해서든 돈을 굴려야 하는 은행으로써는 경쟁적으로 여신 제공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컨설팅회사인 베인의 필리페 드 바케르는 “은행이 거대해진다고 해서 주주가치가 상승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컨설팅 업체인 AT 커니의 크리츠 크뢰거는 “좋은 은행의 규모가 커지는 경향이 있지만, 규모가 크다고 반드 좋은 은행은 아니다”며 “ ‘금융 슈퍼마켓’ 전략을 되돌아 볼 시기가 왔다”고 꼬집었다.

몸집 불리기를 생존의 지상과제로 여겨왔던 각국의 은행들이 금융시장의 `빙하기`가 시작될 경우 이를 이겨낼 수 있을 지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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