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빡한 일상은 몸과 마음의 공백을 지운다. 공상이나 몽상 따위는 사치다. 눈 앞에 주어진 숫자를 들고 하염없이 뛰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펀드 매니저가 왜 치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쫓기듯 바쁘게 뛰면 성과가 더 좋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송성엽 KB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45·사진). 저조한 수익률로 관계사인 국민은행에서조차 외면받던 KB자산운용 펀드를, 수익률은 물론 수탁고에서도 상위권으로 점프하게 만든 주인공의 말이다.
어린 시절, 그는 물리학자를 꿈꿨다. 광활한 우주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행성이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딴 생각하기를 즐겼다"며 "지금 하는 주된 업무도 어린 시절 하던 일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가 정의하는 펀드 매니저의 `주된 업무`는 이렇다.
아울러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에서 지금처럼 전체 이익을 누군가 전부 가져갈 수 있는 구조가 유지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이 나눠갖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지와 같은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도 살펴야 한다.
결국 펀드 매니저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해당 회사의 분기 실적이 아니라 그 회사의 기본 사업모델과 속한 업종, 사회, 지역경제 등의 커다란 흐름이다"
그가 펀드 매니저의 중요한 자질로 `통찰력`과 `상상력`을 꼽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기업이 갖고 있는 핵심 비전과 사업모델, 향후 방향 등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상상하고 하나의 맥으로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눈 앞에 보이는 단기 성과에 연연하기보다는 기업 가치를 관통하는 핵심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후배 매니저들에게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을 토대로 한다. 책을 읽되, 경제학만 파고 들지 말고 사회과학과 인문, 종교, 역사, 문화인류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가리지 말고 읽을 것을 조언했다.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그는 단기 성과에 목 매는 한국 자산운용업계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기 성과를 내기 위해 짧게짧게 사고 파는 매매방식이 사라져야 시장 변동성도 줄고 펀드 매니저도 긴 호흡으로 매매에 임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같은 뜻을 가지고 오랜 기간 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비로소 모두가 공감하고 젖어드는 문화가 달라진다.
"단순한 세대교체만으로는 안된다. 올바른 투자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관리자급에 많이 앉아야 할 것이다. 오래 걸리겠지만 우리나라 증시가 선진시장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이를 위해 그는 국내 기관 투자자들의 역할이 지금보다 훨씬 성숙하고 강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인이나 외국인에 비해 비중이 작은 것은 물론, 단기 성과에 눈이 멀어 잦은 매매에 열을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기관 투자자가 중심을 잡고 제대로 역할을 해야 국내 증시가 보다 안정적인 추세를 잡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짧고 빠르고 바쁘게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길고 천천히 차분하게 가는 것이 훨씬 어렵고 중요하다. 급하게 쫓아다니기보다는 주어진 숫자를 들고 차분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야 한다. 시장이든 개인이든 자신만의 철학을 갖추는 것이 진짜 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