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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마켓in 허지은 기자] 마무리 단계로 알려졌던 SK와 두산의 SK실트론 주식매매계약(SPA) 체결이 코앞에서 멈춰섰다. 인공지능(AI) 수요에 반도체 초호황이 길어지자, SK실트론 매각을 잠정 중단하고 판을 재검토하는 기류가 생기면서다. 반도체 수직계열화를 꿈꾸던 두산 입장에선 날벼락이지만, SK 입장에서도 헐값 매각 논란과 배임 리스크 등이 불거질 수 있어 셈법이 복잡해졌다. 도장 찍기 직전 대외 변수로 판이 흔들리는 이번 사태를 두고 과거 한화의 대우조선해양 인수 무산의 데자뷔가 느껴진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6일 재계와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SK(034730)그룹은 SK실트론 매각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두산(000150)그룹이 SK실트론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후 올해 5~6월 SPA 체결이 점쳐졌으나 마침표 직전 거래 종결이 불확실해진 셈이다. 업계 안팎에선 이를 매각 측의 단순한 변심이라기보다는, 예측 불가능하게 요동치는 환경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로 보고 있다.
‘상도덕’보다 무서운 ‘배임’ 공포
본계약 체결을 직전에 두고 협상이 장기화되는 건 자본시장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다. 특히 대기업 간의 딜일 경우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SK의 장고가 이어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반도체 시장 환경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두산을 우협으로 선정할 때만 해도 SK는 전사적인 재무구조 개선과 리밸런싱(사업 재편)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최근 AI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고 메모리 초호황 주기가 도래하면서 반도체 제조의 가장 기초 소재인 웨이퍼 공급사인 SK실트론 가치가 급등했다. 실제 글로벌 반도체 밸류체인에 포함된 대부분의 기업들은 올해 들어 기업가치가 2배 이상 치솟은 상황이다.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의 경우 연초 이후 시가총액이 각각 2.5배, 3배 뛰었다.
두산 측이 제시한 SK실트론 인수 가격은 5조원으로 알려졌다. SK 경영진 입장에선 불과 몇 달 전 가격에 그대로 회사를 넘겼다가는 회사 자산을 헐값에 매각했다며 주주들로부터 배임 소송에 직면할 수 있다. 실제로 최태원 회장이 최근 대만 컴퓨텍스에서 5년 내 메모리 생산 능력을 2배로 늘리겠다고 공언한 만큼, 그룹 내 핵심 반도체 밸류체인을 쉽게 내줄 수 없다는 기류가 강해진 것으로 풀이된다. 상도덕을 지키려다 실체적인 법적 리스크를 떠안는 위험을 피하겠다는 계산이다.
구속력 없는 ‘우협’의 한계
법적인 관점에서도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은 본계약과 달리 매각을 강제하는 구속력이 없다. 우협은 배타적으로 협상할 수 있는 권리일 뿐, 진행 과정에서 우협 지위를 박탈당해 새로운 원매자를 찾는 경우는 허다하다. 법적 구속력이 생기기 전까지는 언제든 판이 깨질 수 있다는 일종의 그레이 존(Gray Zone)이 존재하는 셈이다.
통상 양해각서(MOU)를 체결할 때 원인 제공 측이 일정 금액의 이행보증금을 몰취당하거나 실사 비용을 보상해 주는 조항을 넣기는 한다. 하지만 기업 가치가 조(兆) 단위로 요동치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위약금을 물어주는 게 이득이라는 계산이 설 수 있다. SK실트론처럼 업황과 기업가치가 동시에 변동하는 경우는 더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
14년 만에 바뀐 운명, 한화의 ‘신의 한 수’
도장 찍기 직전 딜이 엎어진 잔혹사는 과거에도 존재했다. 한화(000880)그룹과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대표적이다. 한화는 지난 2008년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위해 6조3000억원을 베팅하며 우협으로 선정됐고, 본계약 직전까지 가며 인수를 확신했다. 그러나 계약 체결 직전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에 자금 조달 난항을 겪었고, 결국 3150억원 규모 이행보증금을 날린 채 고배를 마셨다. 당시 한화는 시장 신뢰를 잃었다는 비판과 평판 타격을 동시에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파국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무리하게 인수를 완주하지 않았기에 한화는 대공황급 위기 속에서 그룹 전체가 흔들리는 승자의 저주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14년이 지난 2022년 한화는 친환경 선박 전환과 방산 시너지가 극대화되는 완벽한 타이밍에 과거 몸값의 3분의1 수준인 2조원에 대우조선해양을 품어 한화오션(042660)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2008년의 뼈아픈 무산이 14년 뒤 최고의 축복으로 돌아온 셈이다.
이번 SK실트론 매각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은 계약을 미룬 SK에 평판 리스크가 쏠리고 두산은 전략적 스텝이 꼬이며 깊은 내상을 입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결정이 수년 뒤 각 그룹에 부메랑이 될지, 신의 한 수가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결국 이번 파열음은 법적 구속력이 생기기 전까지는 어떤 약속도 유효하지 않으며, 자본시장에서는 상도덕보다 실리와 타이밍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이정표로 기록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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