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년과 정유년이 교차하는 곳…새해 첫 버스 '5618번'

고준혁 기자I 2017.01.01 14:56:39

보성운수 5618번 서울서 가장 먼저 운행하는 버스
03:30분 구로동 출발해 석수역, 여의도 경유
일용직 근로자, 알바, 미화원, 경비원, 대리기사 등 애용
새해 맞아 출근하는 이들과 야근 후 퇴근하는 이들이 교차

정유년 새해 첫날인 1일 오전 4시 서울 구로구에서 영등포구 여의도로 가는 노선인 5618번 첫 버스에 탄 시민들의 모습. (사진=고준혁 기자)
[이데일리 고준혁 기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없으면 시민들 발이 다 묶이잖아요.”

정유년(丁酉年) 새해 첫날인 1일 오전 3시 30분 서울 구로동 보성운수 차고지. 5618번 기사 김서기(54)씨는 “새해 첫날부터 새벽 일찍 일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묻자 “첫 차를 타는 분들은 정류장 도착 시각을 알고 기다리기 때문에 1분이라도 지체하면 안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새해 첫 일출을 맞기 전부터 버스 차고지는 아침을 여는 사람들을 맞기 위해 분주하다.

◇ 3시30분 정유년 첫 버스 5618번

영하의 날씨 속에 버스에 오른 김씨는 운전대 옆 노선표와 시계를 번갈아 보며 운행을 시작했다. 제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도착하기 위해서다. 5618번은 구로동을 출발해 경기 시흥시 석수역을 들러 여의도로 갔다 다시 차고지로 돌아온다. 지난 2004년 환승시스템 도입 이후 노선 개편으로 29대 수준이던 버스가 절반 가량인 15대로 줄고 종점이 시흥시에서 구로동으로 바뀐 탓에 다른 시내버스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운행을 시작한다. 새벽 3시가 넘어 일과를 마감하는 상인들이나 남들이 잠든 시간에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주로 첫차를 탄다.

오전 3시 45분쯤 금천우체국 정류장에서 대기리사 황모(48)씨가 버스에 올랐다. 황씨는 김 기사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를 건넸다. 황씨는 “이 시각에 다니는 버스는 5618번 밖에 없다”며 “금천구 쪽으로 오면 꼭 이 버스를 탄다”고 말했다. PDA단말기에 ‘콜’이 뜨자 황씨는 바로 다음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해 손님을 찾아 떠났다.

두 번째 손님이 탔다. 모자와 목도리로 중무장한 김모(45)씨는 “인력소개소에 간다. 이런 날 일하면 수당을 더 쳐준다”며 “이른 시각엔 이 버스밖에 없어서 매일 타다시피 한다”고 말했다.

이모(44·여)씨는 영등포 청과물시장에 물건을 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가리봉시장에서 30년 넘게 과일장사를 했다는 이씨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라 한꺼번에 많이 가져오지 못한다. 이 시각에 가도 딸기는 아마 없을 것”이라며 졸린 눈을 비볐다.

운전기사 김씨는 “첫차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시민들은 여의도 건물에서 일하는 미화원이나 건물 관리인”이라며 “새벽 시간에 여의도 일대를 순회하는 버스는 5618번이 유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은 새해 첫날에도 어김없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김씨는 “그나마 휴일이라 그렇지 평소 같으면 서 있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찬다”고 말했다.

◇ 2017년을 맞는 이들과 2016년 보내는 이들 엇갈려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미화원으로 일하는 박모(63·여)씨는 “교회는 전날 송구영신 예배를 하다보니 새해 첫날에도 출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물 관리인 차모(68)씨는 “이 버스 덕분에 친구가 많이 생겼다. 매일 보다보니 서로 얼굴을 알아서 가벼운 눈인사 정도는 다들 한다”고 했다.

새벽길을 달리는 5618번 버스에는 남들보다 빨리 새해를 시작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아직 2016년을 마무리하지 못한 사람들도 탄다.

택시기사 채모(64)씨는 “오전 3시 30분쯤 운행을 마친 뒤 20분 정도만 더 기다리면 버스를 탈 수 있어 회사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버스를 탄다”며 “1분도 틀리는 법 없이 제시간에 오는 게 용하다”고 말했다. 24시간 렌트카 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대학생 김모(26)씨는 “야간에 일하면 시급을 1.5배 더 쳐 줘서 방학 기간동안 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새해를 맞아 밤샘기도를 마치고 귀가하는 손님들이 내리자 어느새 버스는 구로동 차고지에 도착했다. 시계는 오전 5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고지에 마련된 작은 사무실 안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김씨는 두 번째 운행 준비를 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오전 6시 20분 5618번 버스는 낮은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들의 새해 희망을 실어나르기 위한 두 번째 시동을 걸었다.

1일 오전 3시 20분 서울 구로구 구로동 보성운수 차고지에서 버스들이 새해 첫날 운행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고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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