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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제공] 강원도 홍천 서석면에 위치한 고양산. 해발 650m 부근까지 30여분을 헉헉거리며 걸어 올라간 끝에 무궁화(無窮花) 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수관폭(양쪽 가지 끝의 너비) 7.7m, 줄기 둘레 36.7㎝, 높이가 7.5m에 이르는 나무. 무궁화 나무로는 국내 최대 크기라고 전문가들이 추정하는 나무다. 나무 나이는 50~100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예쁘거나 보기 좋은 나무는 아니죠?" 함께 산을 올라간 '나무해설도감' 저자 윤주복씨가 넌지시 물었다.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무궁화 나무라기엔 무척이나 컸지만, 꽃송이가 서너 개 피었을 뿐, 잎이 무성하지도 가지가 아름답게 뻗지도 못한 채 키만 훌쩍 큰 느낌이다. 홍천군청 산림청 이계철 주사는 "가래나무가 햇빛을 막는 탓에 나무가 제대로 가지를 뻗지 못했고 수형도 훌륭하진 않다"며 "역사적 가치로 봐달라"고 말했다.
◆ 누가 무궁화를 모함했나
무궁화는 나라꽃이다. 하지만 무궁화만큼 곁에 두고 보기 힘든 꽃도 없다. 교과서 속지나 대통령 휘장에서나 본 듯한 느낌. 때론 담벼락에 핀 장미나 여의도 공원의 벚꽃보다도 멀게 느껴진다. "무궁화는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도 간혹 있다. 그래서 감히 이런 질문을 던져보기로 마음 먹었다. "왜 무궁화는 보기 힘들죠? 왜 무궁화는 촌스럽게 느껴지죠?"
'무궁화 박사'로 불리는 국립산림과학원 박형순 박사는 "그 질문을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라며 "이에 대한 논란은 예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이야기는 195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부 화훼연구가나 식물학자들은 무궁화를 국화로 삼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무궁화는 남쪽에서 주로 피는 꽃인 만큼 한반도 전역에서 볼 수 없는 지역적 한정성을 안고 있고, 진딧물이 많아 청결하지 못하며, 원산지가 우리나라가 아닌 인도라서 민족을 상징하기 적절하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서울대 원예학과 류달영(1911~2004) 박사, 무궁화애호운동회 김석겸 회장, 언론인 주요한(1900~1979) 등이 '무궁화는 기록상으로도 이미 1000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자생해 '근화'(槿花) 같은 이름으로 불렸던 우리 꽃이며, 함경도 일부 지방에서도 피는 꽃이고, 진딧물에 강한 교배육성종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반박하면서 논쟁이 사그라졌다는 것이다. 박형순 박사는 "일반 사람들은 한낮에 오므라들거나 잘못 핀 무궁화를 주로 만날 수밖에 없는데, 제대로 탐스럽게 피어난 눈부신 무궁화 꽃송이를 봤다면 애초에 이런 논쟁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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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다롭다고? 예뻐서 그래
무궁화는 까다로운 꽃이다. 아무데서나 그 눈부신 미모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예쁜 무궁화 꽃송이를 보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무궁화란 어떤 꽃인가'의 저자 송원섭은 '무궁화는 햇빛을 잘 받고, 물빠짐이 좋고, 거름을 충분히 얻어야만 훌륭한 꽃을 피운다. 바람도 싫어하고 성질이 민감해, 환경에 변화가 있으면 그 반응이 바로 꽃에 나타나서 형태도 색깔도 변해 버린다'고 썼다.
꽃송이를 보는 시간대도 중요하다. 미인은 잠꾸러기. 무궁화도 일찍 잠드는 꽃이다. 무궁화는 새벽 6시에 만개한다. 정오가 되면 벌써 꽃송이가 오므라들기 시작한다. 오후 6시쯤이면 꽃송이는 몸을 완전히 접는다. 절기로 본다면 8월 1일을 전후한 열흘씩이 가장 화창한 무궁화를 볼 수 있는 때다. 윤주복씨는 "아침햇살이 퍼질 때 꽃이 가장 아름답다"며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매일 새벽녘 이슬 젖은 새 얼굴로 인사하는 꽃이 바로 무궁화"라고 말했다.
'신록예찬'으로 유명한 수필가 이양하(1904~1963)의 글을 보면 이른 아침에 만나는 무궁화와 해질 무렵 만나는 무궁화가 얼마나 다른 인상을 주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보라에 가까운 빨강, 게다가 햇살을 이기지 못하여 시들어 오므라지고 보니 빛은 한결 생채(生彩)를 잃어 문득 창기의 입술을 연상케 했다'고 무궁화에 대해 실망하는 글을 썼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수줍고 은근하고 겸손한 꽃이다. 은자가 구하는 모든 덕을 구비했다. 어디까지든지 점잖고 은근하고 겸허하여 너그러운 풍모를 지녔다'라고 고쳐 썼다.
◆ 미인을 만나러 가는 길
이쯤 되니 직접 볼 필요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무궁화 나무를 길러내고 있다는 경기도 수원 국립산림과학원으로 향했다. 흰 꽃잎 안쪽이 붉은 백단심계, 분홍 꽃잎에 속이 붉은 홍단심계 무궁화가 가로수로 끝도 없이 늘어섰다. 가지치기를 적당히 해준 나무들은 타원형으로 곱게 자라고 있었다. 처음 봤다. 이렇게 가득 꽃송이가 물결치는 무궁화 나무는.
박형순 박사는 "가지치기를 조금씩 해주면 훨씬 더 탐스러운 꽃송이를 피우는 나무가 무궁화"라며 "빽빽하게 심는 것보단 조금씩 공간을 두고 심는 것이 더 잘 자란다"고 말했다.
윤주복씨는 "무궁화의 아름다움을 입으로 말하는 건 사실 거추장스러운 일"이라며 "히비스커스라는 학명 값을 하는 나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웃었다.
무궁화의 학명은 '히비스커스 시리아큐스(Hibiscus Syriacus)'로, '히비스커스'는 '이집트의 여신을 닮은' 이라는 뜻. 무궁화의 서양 이름도 그래서인지 '로즈 오브 샤론(Rose of sharon)'이다. 샤론은 고대 팔레스타인 서부의 비옥한 평야 혹은 성경에 나오는 성스러운 땅을 일컫는 말로, '성스럽고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윤주복씨는 "무궁화는 예쁘기도 하지만 강한 꽃"이라고 말했다. "일본 사람들은 한때 무궁화 꽃을 못 피우게 하려고 홍천에 핀 무궁화 7만주를 모두 불태웠대요. 무궁화를 보거나 만지면 눈에 핏발이 서거나 부스럼이 생긴다고 거짓소문을 퍼뜨리면서 '눈의 피 꽃', '부스럼꽃'이라고도 불렀다죠. 그럼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매일 피고 지고를 반복하면서 100일 동안 피는 꽃이랍니다. 무궁화의 어디가 아름다우냐 물으셨죠? 이게 제 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