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결을 따라 걷는 늦가을 남원
달빛이 머무는 정원, 광한루원
삶이 스며 있는 한옥, 남원예촌
기억 잇는 도시 공간, 남원다움관
전통의 미학을 전하는 공간 ''화인당''
역사를 품은 공간 ''남원향토박물관''
[남원(전북)=글·사진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늦게 찾아온 가을이 짧게 머물다 간다. 늦더위가 계절의 문턱을 끝까지 붙잡으며 버티더니 어느새 가을은 절정을 지나 겨울의 초입에 서 있다. 그래도 남원은 여전히 가을의 온기를 품고 있다. 요천의 물빛은 깊고, 들판의 색은 부드럽다. 낮에는 한옥의 처마 끝에 빛이 머물고 밤에는 달이 누각 위에 걸린다. 지금의 남원은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을 가장 온전히 품은 도시다.
 | | 조선의 이상을 품은 정원인 전남 남원의 ‘광한루’. 세종 2년, 전라감사 정인지가 처음 지은 누각은 조선 선비들이 꿈꾸던 이상향을 담고 있었다. 본래 이름은 ‘광통루’였으나 성종 때 남원부사 이언적이 하늘의 달궁을 뜻하는 ‘광한루’로 바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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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의 이상을 품은 정원인 전남 남원의 ‘광한루’. 세종 2년, 전라감사 정인지가 처음 지은 누각은 조선 선비들이 꿈꾸던 이상향을 담고 있었다. 본래 이름은 ‘광통루’였으나 성종 때 남원부사 이언적이 하늘의 달궁을 뜻하는 ‘광한루’로 바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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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원 광한루원 국가유산야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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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이상을 품은 정원, 광한루원남원을 이야기할 때 ‘광한루’를 빼놓을 수 없다. 세종 2년, 전라감사 정인지가 처음 지은 누각은 조선 선비들이 꿈꾸던 이상향을 담고 있었다. 본래 이름은 ‘광통루’였으나 성종 때 남원부사 이언적이 하늘의 달궁을 뜻하는 ‘광한루’로 바꿨다.
광한루는 현실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신화의 무대다. 연못은 은하수를 상징하고 오작교는 하늘과 땅을 잇는다. 다리 아래 네 개의 홍예가 물길을 트며 세계의 경계를 부드럽게 넘는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곳에서 이상을 그리고 시를 읊었다.
정유재란 때 불탔던 누각은 인조 4년인 1626년에 복원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그때 세워진 구조를 간직하고 있다. 기둥과 서까래의 선이 단정하고 처마 끝은 부드럽게 휘어 있다. 그 아래로 연못이 펼쳐지고 요천의 물결이 이어진다.
광한루의 누각에 오르면 ‘교룡산’과 ‘금암봉’이 보인다. 멀리 지리산 능선이 희미하게 이어지고 바람은 물빛을 흔든다. 정원 한가운데 오작교가 놓여 있고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그 위에 얹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세속이 잠시 멈춘다.
밤이 되면 광한루는 또 다른 세상이 된다. 달빛이 연못을 비추고, 누각의 기둥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남원 국가유산 야행이 열리는 시기에는 정원 전체가 빛의 물결로 변한다. 조명이 많지 않아 오히려 달빛의 은은함이 살아난다. 사람들은 물가에 앉아 조용히 달을 바라본다. 오작교 위로 걸어가면 달이 발밑에 깔리고 그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
 | | 전통이 숨쉬는 한옥호텔 ‘남원예촌’의 부용정. 예촌의 연못에 선 정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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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원의 기억을 품은 기록의 공간인 ‘남원다움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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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원의 핫 플레이사 하녹과 현대의 감성이 만나는 곳 ‘피오리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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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시내 곳곳에 스며든 옛 풍경들광한루를 마주한 ‘남원예촌’은 전통이 숨 쉬는 한옥호텔이다. 한옥의 지붕선이 낮고 단정하다. 장독대가 마당마다 놓여 있고 대청마루에는 따스한 빛이 스며든다. 방마다 구들장이 깔리고 벽에는 해초풀과 황토의 질감이 남아 있다. 숙박이 가능한 공간이지만 낮에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국화 향이 은은하게 따라온다.
예촌의 연못가에 선 정자 ‘부용정’은 물 위의 누각이다. 잔잔한 물결이 바람에 흔들리면 지붕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그 그림자 속에 계절이 비친다. 마루에 앉은 사람은 따로 할 일이 없다. 햇살과 바람이 그날의 풍경이 된다.
남원의 또 다른 얼굴 ‘남원다움관’은 도시의 기억을 품은 기록의 공간이다. 1970년대 상점과 다방, 공중전화 부스,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남원의 시간을 대신한다. 벽에는 흑백사진이 걸려 있고 타자기와 재봉틀, 라디오가 그 시대의 공기를 전한다. ‘인력거 VR 체험관’에 들어서면 옛 남원의 길이 화면 속에 되살아난다. 사람의 손끝에서 지켜온 시간이 공간을 이룬다.
다움관을 나서면 전통의 옷을 입은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 향하는 곳이 ‘화인당’이다. 이름 그대로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을 위한 공간이다. 조선 시대 복식부터 생활 한복까지 고운 옷들이 정갈하게 걸려 있다. 직접 한복을 입고 광한루를 거닐면 바람이 옷자락을 흔든다. 한복의 선과 움직임이 한 폭의 그림처럼 이어진다.
한옥과 현대 감성이 만나는 곳 ‘피오리움’은 남원의 또 다른 핫플레이스다. 나무기둥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창가에는 계절의 꽃이 놓여 있다. 국화와 장미가 어우러지고 그 향이 커피잔 위에 내려앉는다. 여행자들은 잠시 머물며 계절을 마신다. 한 모금의 커피, 한 송이의 꽃이 남원의 오후를 완성한다. 남원의 전통은 과거의 풍경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손길과 삶의 속도 안에서 살아 있는 현재다. 한옥의 지붕 아래에는 세월이 머물고 그 아래 사람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다.
 | | 남원의 남쪽 끝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정령치. 남원과 하동, 구례를 잇는 능선에 자리해 ‘지리산의 하늘길’로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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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리산의 남쪽 품에 안긴 ‘달궁계곡’은 달이 잠긴 골짜기라는 뜻을 지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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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리산 끝자락에 자리한 ‘신생마을’은 최근 남원에서 가장 ‘뜨거운’ 가을 명소로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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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품은 남원의 가을남원의 남쪽 끝, 지리산 자락에 ‘정령치’가 있다. 해발 1172m. 남원과 하동, 구례를 잇는 능선에 자리해 ‘지리산의 하늘길’이라 불린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오르면 산허리를 감싸는 안개가 천천히 걷히고 그 사이로 남원의 산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마다 단풍이 불길처럼 번지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잎들이 한꺼번에 흔들린다. 하늘은 유리처럼 맑고 구름은 낮게 흐른다. 운해가 밀려오면 산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지고 세상은 잠시 흑백의 수묵화가 된다. 귀를 기울이면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와 바람의 숨소리만이 들린다.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낙엽이 발끝에 닿는다.
산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 ‘달궁계곡’이 나타난다. 지리산의 남쪽 품에 안긴 이 계곡은 지리산국립공원 남원지구의 대표 경승지다. 이름 그대로 달이 잠긴 골짜기, ‘달궁’이다. 달궁계곡은 가을의 풍경이 더 깊다. 낙엽이 물 위를 따라 흐르고, 바위에는 이끼가 짙게 깔려 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계곡은 순식간에 다른 세상이 된다. 산 그림자가 물결 위로 내려앉고 그 그림자 사이로 작은 물고기가 헤엄친다. 나무들은 말없이 서 있고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건넨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숲은 스스로의 속도로 계절을 바꾼다.
계곡길이 끝나면 ‘신생마을’이 나타난다. 지리산 자락의 끝자락에 자리한 이 마을은 요즘 남원에서 가장 ‘뜨거운’ 가을 명소로 꼽힌다. 한때 조용한 농촌이던 이곳이 이제는 SNS 피드를 가득 채우는 사진 속 배경이 되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마을의 언덕은 분홍빛 핑크뮬리와 붉은 코키아로 물든다. 바람이 스치면 분홍 물결이 일고 햇살이 비치면 들판이 부드럽게 반짝인다.
마을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에는 커플과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걷는다. 젊은 여행객들은 분홍빛 언덕에서 사진을 찍고,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코키아 사이를 뛰어다닌다. 어른들은 벤치에 앉아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SNS에는 ‘남원 핑크뮬리 명소’, ‘지리산 인생샷 포인트’라는 해시태그가 연이어 올라온다.
이곳의 매력은 색깔에 있다. 핑크뮬리의 분홍빛, 코키아의 붉은빛과 노란빛, 그리고 멀리 이어지는 지리산의 푸른 능선이 하나의 화폭을 이룬다. 마을 안쪽에는 포토존과 작은 조형물이 마련돼 있다. 흰색 마차 모양의 벤치, 유리문 프레임, 나무 아치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관광객들은 계절의 풍경 속에 자신을 넣고 한 장의 사진을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