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유출 적신호"..자동차·IT 전산업 노출

정명수 기자I 2005.10.25 14:04:26

"협력사·내부직원 믿을 데가 없다"
신뢰붕괴가 원인..근본대책 절실

[이데일리 정명수 안승찬기자] 현대자동차 협력사에 의한 기술 유출 시도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다. 국내 주요 기업들이 보유한 핵심 기술이 내부직원 또는 협력사 등을 통해 해외 경쟁사로 빠져나가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같은 기술 유출 가능성이 IT 분야, 자동차, 조선 등 국내 산업계 전반에 걸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전에 방지할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데 있다. 믿고 일을 맡겨야할 내부 직원과 협력사와의 신뢰 관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면서 기술 개발의 원동력 자체가 손상받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다.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어둡다
이번에 문제가 된 현대차의 경우도 중국 업체와 접촉했던 A사는 10년째 현대차와 거래했던 1차 협력업체였다. 현대차의 1차 협력업체는 390여개에 달한다. 이중 신차 개발 프로젝트와 같은 1급 기업비밀을 함께 하는 핵심 기업은 수십개 정도다.

현대차는 협력사 일부가 중국 업체에 내구성 테스트 결과 등을 유출할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20여개 핵심 협력사에 대해 특별 감사를 벌였다. A사는 관련 업무 이후 폐기해야할 컴퓨터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자체 보관하고 있었고, 현대차와 사전 협의 없이 중국 업체와 접촉한 것 등이 적발돼 협력업체 자격을 박탈 당하는 조치를 받았다.

현대차는 A사를 통해 유출된 정보가 없다고 밝혔지만, 특별 감사에서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정보 유출 사례가 있는 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400여개나 되는 협력사를 내 식구처럼 일일이 조사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보안 점검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번에 적발된 정보 유출 시도도 중국 현지 법인과 현대차 내의 관련 정보팀에서 업계 동향을 파악하다가 정황을 포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내 보안 점검 및 교육 강화 ▲정보 유출에 대한 내부 감사 강화 ▲행위 발견시 고발 및 법적 조치 등의 보안지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같은 지침만으로는 정보 유출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정보유출 내부자 소행이 대부분
국정원 산하 산업기밀보호센터에 따르면 지난 98년 이후 2004년까지 국내 산업기술 유출사례는 총 96건에 금액으로만 58조2000억원에 달한다. 퇴직 직원을 통한 유출시도 40건, 현직 직원을 통한 유출시도 16건 등 대부분이 전현직 직원을 통해 유출되고 있다.

유출기술 내용도 반도체·휴대폰·LCD 등 IT관련 기술이 주류를 이뤘지만, 이번 현대차의 경우처럼 자동차, 조선 등 전산업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국내 대형 조선소의 중요 핵심 설계도면들이 중국 조선소에 나돌고 있다는 얘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연도별 기술유출 적발 건수는 2002년 5건, 2003년 6건, 2004년 26건으로 급증했다. 적발되지 않은 소소한 사례를 포함할 경우 산업 기밀 정보의 유출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분석이다.

주요 사례를 보면 지난해 9월 국내 LCD 관련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연구원 A씨는 갑작스럽게 사표를 제출했다. A씨는 대만의 경쟁사로부터 고액 연봉을 제안받는 대신, 다른 연구원 3명과 공모, LCD 기술을 유출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같은해 1월 국내 휴대폰 생산업체 연구원 B씨도 중국 기업의 한국지사 부사장으로부터 이직을 통한 기술유출 제의를 받았다. B씨는 같은 회사 후배 연구원 5명을 설득해 국내 유령 회사로 이직, 기술유출을 시도하려다 적발돼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지난해 10월 국내 PDP(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 제조업체인 C전자의 한 연구원은 임원승진에서 떨어진 뒤 회사에 불만이 쌓였다. 그는 C전자에서 퇴직 해 외국에서 유통업에 종사하던 김모씨로부터 PDP기술 매매 제의를 받았고, 대만 디스플레이 제조사인 Z사에 2억원에 기술자료 일부를 제공하기로 계획했다. 보안장비가 없는 뒷문을 통해 관련 자료를 유출시키려다 적발됐다.

다른 나라에서 국내 기술정보를 빼내려 위장 입국한 사례도 있다. 대만 D기업 직원 3명은 관광객 신분으로 입국해 반도체 공장 견학을 신청했다. 정해진 견학 코스를 돌다가 은근히 대열에서 이탈해 공장 사진 촬영에 몰두했다. 반도체 공장의 경우 외관만 봐도 대략적인 생산규모 등을 간파할 수 있다.

◇M&A도 기술습득 창구
국제 거래가 빈번해지면서 크로스 오버(Cross Over 해외간 거래) M&A역시 선진 기술을 습득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국내 의료기기 생산업체인 E사는 중국 기업과 합작투자 진행 과정에서 중국의 강제인증절차에 따라 핵심도면을 제출했다. 몇개월 후 중국측 회사는 합작투자를 중단하고 불법복제 제품을 생산·판매해 수백억원 규모의 대중국수출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대하이닉스에서 분사한 현대시스콤은 국책과제로 개발한 CDMA 기술 및 인력 등을 중국 기업에 매각키로 해 핵심기술의 이전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이닉스의 경우 워크아웃 과정에서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졌을 때 해외 기술 정보맨들의 주요 타깃이 되기도 했다. 하이닉스는 지난 2001년 10월 워크아웃에 들어간 이후 D램 반도체 사업부만 남겨놓고 알짜 사업인 휴대전화기·액정표시장치(LCD) 부문을 포함해 20개가 넘는 사업부를 매각하거나 분사했다.

◇신뢰회복 등 근본대책 필요
이처럼 국내 산업이 경쟁국 산업 스파이의 먹이감으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보안 개념이 약하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최근 394개 민간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보안담당 부서를 둔 기업은 13%에 불과했다. 70%가 넘는 대다수 중소기업은 기밀 보호 규정조차 갖추지 않았다.

반면 산업 스파이 활동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과거처럼 내부자를 유혹하는 수법에서 벗어나, 사업 확장을 빌미로 협력사에 접근하거나, 위장 합작법인을 세워 핵심 기술인력을 일거에 영입하는 수법도 사용되고 있다.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진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직 임직원이 `뒷일`을 생각해 업무 관련 기밀 문서를 개인적으로 챙기거나, 퇴사후 `딴 살림`을 차리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

이번에 문제가 된 현대차의 협력업체 A사도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해 중국 업체와 접촉했다고 말하고 있다. 생존 전략 차원에서 현대차 이외의 거래처가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현대차의 내구재 테스트 데이터 등이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원천 기술을 보유한 대기업과 1차 협력사의 공생관계, 신뢰관계가 무너진 것이 핵심 기술 유출의 근본적인 배경이라는 분석이다. 과거 중소기업들이 신기술을 개발, 대기업과 업무 관계를 맺었을 때 그 기술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던 것이 누적되면서 중소 협력사들도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카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는 점도 기술유출의 한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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