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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온 편지-안보 딜레마]③대낮 신경가스 공격에도..러 제재, 안하나 못하나

함정선 기자I 2018.03.12 10:04:02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의혹 현장 감식 중인 영국 수사당국(출처:세일즈버리 저널/인디펜던트)
[런던=이데일리 이민정 통신원] 얼마 전 영국 남부 소도시 솔즈베리 한 쇼핑몰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된 남녀가 러시아군 정보부 출신으로 영국 국외담당 첩보기관인 MI6에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러시아 정보원 등의 정보를 팔아넘긴 세르게이 스크리팔(66) 대령과 딸(33)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중태에 빠트린 데 신경가스가 쓰인 것으로 드러났고요.

스크리팔은 이중 첩자 행위가 발각돼 러시아에서 2006년 징역 13년을 선고받았지만 2010년 미국에서 붙잡힌 러시아 스파이들의 본국 송환 조건으로 풀려나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와 살고 있었죠.

스크리팔 사건은 영국 땅에서 방사능 독극물이 들어간 차를 마시고 사망한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이었던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사건과 비교되면서 배후가 러시아 당국, 즉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졌을 것이라는데 무게가 쏠리고 있습니다.

리트비넨코는 1998년 FSB 근무 시절 반정부 성향의 기업인 암살 지시를 거부하면서 러시아 당국에 찍혀 징역을 살고, 이후 영국으로 망명해 러시아 비판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왔었죠. 2006년 런던 한 호텔에서 옛 FSB 동료를 만나 차를 마신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약 한 달 뒤 사망했습니다.

당시 영국이 리트비넨코 암살에 쓰인 물질을 밝혀내고, 러시아 당국이 배후에 있을 ‘상당한 가능성’(Strong probability)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데는 10년이 걸렸습니다.

러시아가 연관성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는 스크리팔 사건의 경우도 누가 암살을 지시했는지 배후를 찾아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또한 설령 러시아가 배후로 드러나더라도 실효성 있는 제재 방안이 적어 영국의 고민이 커지고 있습니다.

BBC는 리트비넨코 때처럼 영국 당국이 러시아 외교관 추방이나, 러시아 기업이나 개인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방안, 러시아인의 영국 비자 취득을 전반적으로 더욱 어렵게 하는 방안 등을 시행할 수 있지만 일부는 러시아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킬만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고, 일부는 실현 가능성이 크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영국 당국은 당시 리트비넨코 사건이 러시아의 소행으로 드러나자 주영 러시아 외교관들을 추방했지만 이 같은 조치가 러시아에 타격을 줬다는 평가는 못 받습니다.

스크리팔 암살 시도 배후가 러시아 당국으로 밝혀질 경우 EU 와 연대해 러시아 개인과 기업에 대해 일괄적인 제재를 가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이미 영국은 브렉시트 협상 때문에 EU와 틀어져 있는데다 몇몇 EU 회원국들은 이미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및 협력 증진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 제재와 관련해 EU 지지를 받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외무장관은 앞서 만약 스크리팔 독살 시도가 러시아 소행으로 밝혀질 경우 올여름 열리는 러시아 월드컵에 영국 측 고위대표단 파견을 하지 않는 방안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이같은 조치가 과연 러시아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또한 이미 영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 합병, 시리아 독재정부 지원, 서방에 대한 사이버공격 등을 강하게 비판하며 러시아와의 갈등의 골이 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문제, 북핵 문제, 이란 핵문제 등 중요한 안보 문제를 두고 러시아와의 협조가 절실해 스크리팔 사건의 배후가 러시아로 밝혀지더라도 양국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정도의 강한 보복 제재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스크리팔 사건으로 영국의 안보 능력에 대한 우려와 비판도 커지고 있습니다. 결국 스크리팔 부녀가 대낮에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신경가스 암살공격을 당했다는 것은 영국 당국이 자국 땅에서 보호해야 할 인물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이미 영국 의회 일부 의원들은 영국에 협조하느라 정치 망명자가 된 스크리팔 같은 인물들에 대한 보호 정책에 대해 영국 정부에 전반적인 리뷰를 요구한 상태입니다.

스크리팔 사건은 현재 런던 경찰 내 대테러전담반이 수사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나,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특정 집단의 정치적 목적 등을 위해 자행된 테러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는 것이죠.

영국은 최근 수년간 유럽 내에서도 가장 빈번히 테러가 발생하면서 영국 당국의 자국민 보호 능력에 대한 비판에 직면했었죠. 스크리팔 사건으로 이 같은 비판이 또 한번 거세질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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