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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기름값 묘해” 한마디에…정유사 팔목비틀어
지난 2011년 1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묘한 기름값’ 발언이 시작이었다. 이 대통령은 국민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요즘 기름값을 보면 주유소 등의 행태가 실로 묘하다”고 언급했다. “(2008년에) 국제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일 때 휘발유 가격이 L당 2000원 정도였는데, 지금 80달러 정도인데도 1800원이니 더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국제 유가 급락과 달리 국내 석유제품 가격은 ‘찔끔’ 내렸으니 물가를 잡을 해법을 찾아보라는 주문이었다.
직설의 파장은 컸다. 당장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최중경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정유사 팔목 비틀기에 나섰다. ‘경제 검찰’ 공정거래위원회도 즉각 SK에너지·GS칼텍스·S-OIL·현대오일뱅크 등 정유사의 담합 혐의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결과는 ‘헛발질’이었다. 정유사가 그해 4월 SK에너지를 필두로 휘발유·경유값을 L당 100원씩 내렸지만, 할인 기간이 끝난 7월이 되자마자 가격은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SK 계열 3사와 S-OIL, 현대오일뱅크에 담합 과징금 2548억원을 부과했던 공정위는 법정에서 패소해 2015년 과징금 전액과 환급 가산금 321억원을 토해내기까지 했다.
세금은 건드리지 않고 변죽만 울린 결과다. 현재 휘발유에는 L당 교통에너지환경세 529원(경유는 375원)과 주행세 137.54원(교통세의 26%), 교육세 79.35원(교통세의 15%)이 붙는다. 지난달 넷째 주 기준 주유소 휘발유 판매가격(L당 1404원)에서 이 유류세(油類稅) 3종 세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53.1%에 이른다. 유류세는 가격이 아닌 쓰는 양에 비례해 부과하는 ‘종량세(從量稅)’다. 국제 유가가 오르거나 내려도 기름값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석유 제품은 세금이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정유사도 원유를 미리 사는 경우가 많아서 국제 유가가 변동해도 최종 판매가격은 탄력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朴 “특단 대책” 주문에 ‘경유값 인상’
현 정부 들어서도 기름값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국무회의에서 “미세먼지를 줄일 특단의 대책”을 촉구한 것이 계기였다.
환경부가 기름값 인상 불씨를 댕겼다. 경유에 붙는 세금을 올려 미세먼지 발생 주범인 디젤차 소비를 억제하겠다는 카드를 꺼낸 것이다. 휘발유와 경유의 상대 가격 비율은 2007년에 100대 85(이전에는 100대 75)로 조정됐다. 이를 95대 90 수준으로 바꾸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과거 가격 인하에는 팔을 걷어붙였던 정부 부처가 증세에는 소극적이기만 했다. 기획재정부가 세금 인상에 반대하는 등 부처 간 견해차를 빚자 급기야 여당인 새누리당이 “경유값 인상은 안 된다”고 교통정리를 했다.
‘특단의 대책’ 논의 25일 만인 3일 발표된 ‘특별 대책’에서 결국 세금 인상 방안은 빠졌다. 경유값은 “에너지 상대가격 조정 방안도 검토하겠다”는 정도로 어물쩍 넘어갔다. 공해 차량 수도권 운행 제한, 친환경차 보급 확대, 노후 화력발전소 가동 중단 등 과거 대책의 재탕에 그친 ‘면피용’이라는 비판에 정부는 “기존 어느 대책보다 진일보한 실효적 대책”이라는 해명을 내놨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문제 원인을 정확히 짚고 단기 ‘대책’ 아닌 장기적 시각의 ‘조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만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은 그동안 에너지 가격 정책을 잘못 써서 차량 대형화, 중형차 이상 디젤차 소비 증가 등 시장 왜곡을 불렀다”고 꼬집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한국의 휘발유 대비 경유값 비율은 8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국 중 일곱번째로 낮았다. 우리나라은 일반 휘발유를, 다른 26개국은 고급 휘발유(옥탄가 95 이상)를 집계한 것이어서 이 순위는 더 올라갈 여지도 있다. 홍기용 교수는 “경유 소비층이 과거 화물차 운전자 등 서민층에서 현재 중대형 디젤차 운전자로 확산한 것을 고려하면 국내 휘발유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싼 것은 사실”이라며 “일단 휘발유에 붙는 세금을 내리고 경유는 장기적으로 세금을 인상하겠다는 신호를 줘 경유차 소비 감소를 유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