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지난 9일 오후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전력산업구조 모색을 위한 정책토론회'. 한국전력(015760) 5개 발전회사간 경쟁촉진과 한전-한수원 통합여부 등을 담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정책연구과제가 발표된 이날 토론회장은 욕설과 일부 과격인사들이 뿌린 소화기 분말로 난장판이 돼버렸다.
지역 의회 의원들과 시민단체 100여명이 단상을 점거하며 파행으로 끝나자 김영학 지식경제부 차관은 "더 이상 공청회는 없다. (한전 노조, 유관 기관 등)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은 개별적으로 듣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과천 청사에 돌아온 김 차관은 기자실에 들러 "그래도 공청회를 하긴 한 것 아니냐"며 파문을 덮었다.
#장면 2. 지난달 30일 오후 공공기관 임원들에 대한 성과연봉제 도입방안이 발표된 기획재정부 기자실.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마치고 기자실에 들어선 담당 국장이 성과연봉제 도입방안에 대해 "의미있는 방안"이라며 자화자찬 했다.
그러나 다음날 기자와 만난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당초 정부의 계획보다 크게 후퇴했다"며 "정부가 (공기업 노조에) 굴복하는 사인으로 비쳐질 것 같다"고 우려했다.
다른 고위관계자는 "성과연봉제 도입방안이 발표된 지난해부터 1년여 작업기간동안 노조나 국회(관련 상임위원회)로부터 정말 크게 시달렸다"며 "이 정권하에선 성과연봉제의 전면 도입은 사실상 물건너 간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명박 정부의 공기업 개혁이 표류하고 있다. 민영화와 통폐합, 기능조정 등 각종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물론 공기업 내부의 인사혁신, 보수체계 개편, 노사관계 개선 등 각종 경영효율화 방안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은채 난항을 겪고 있다.
개혁추진 의지의 약화, 실천전략의 부재로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이 떨어진데다 개혁에 저항하는 이해관계자들의 거센 반발에 떠밀려 국가경영시스템의 재설계를 목표로 야심차게 추진돼왔던 공기업 개혁드라이브는 점차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날로 쪼그라드는 공기업 개혁 패키지
이명박 정부는 정권출범 직후인 2008년초 공기업개혁을 국정의 핵심과제로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였다. 곽승준 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공기업 50여개를 민영화하고, 50여개를 통폐합하는 등 305개 공기업중 3분의 1에 달하는 100개 기관에 '메스'를 가하겠다는 전방위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해 상반기 내내 '촛불시위'에 끌려다니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공기업 민영화방안은 '공기업 선진화 방안'이라는 명칭으로 슬그머니 간판을 바꿔달더니 구체적인 개혁프로그램도 크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해 8월 발표된 1차 선진화 계획에선 민영화, 통폐합 등 각종 구조조정 대상 공기업이 41개 기업으로 대폭 축소됐다. 특히 민영화대상으로 분류된 27개 기업중 현 정권이 처음으로 지정한 기업은 인천국제공항공사 등 5개 공기업에 불과했다. 산업은행,기업은행 등 대부분의 공기업들은 이미 정권 출범전부터 민영화계획이 잡혀 있던 대상들이었다.
정부는 이후 2009년 3월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공공기관들에 대한 통합, 폐지, 기능조정, 경영효율화, 정원감축 등 각종 선진화계획을 무성하게 쏟아냈다. 하지만 주택공사와 토지공사의 통합 외에는 특별히 가시적인 성과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비판이다.
최근 불거진 전력산업구조개편안을 둘러싼 공청회 파문, 공기업 임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성과 연봉제 도입 방안 등 공기업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메스를 가하는 대표적인 두가지 개혁방안이 모두 큰 잡음을 일으키며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2001년 처음 마련된 전력산업구조개편안은 지난 10년 가까이 잠복해 있다 현 정부들어 다시 수면위로 부상했으나, 민영화 추진에 대한 정부의 의지부족, 어정쩡한 태도, 이해관계자들간 조정력 부재만을 여실히 드러낸 채 좌초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획재정부 스스로 공기업개혁의 결정판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성과연봉제 도입방안도 각종 선거를 앞두고 공기업 노조의 반발에 밀려 대다수 공기업 직원들은 배제한채 임원만을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무늬만 개혁, 반쪽짜리 개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 날로 불어나는 공기업 몸집
공기업 개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공기업의 비대화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체 경제규모(국내총생산, GDP)와 비교한 공기업자산 규모도 같은기간 68.9%에서 82.9%로 14%포인트 급등했다. (왼쪽위 그래프 참조)
같은기간 부채규모는 456조7000억원에서 596조3000억원으로 30.6% 증가했다. GDP와 비교하면 46.8%에서 56.1%로 10%포인트 가까이 늘었다.
공공기관 인력도 더 늘어났다. 재정부 내부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분석대상 286개 공공기관에 재직하고 있는 공기업 직원은 24만8821명으로 정권 출범전인 지난 2007년말 24만 4704명에 비해 4117명(1.6%) 늘어났다.
(오른쪽 그래프 참조)
재정부는 공기업 정원이 2년간 1만5002명이 감소했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실제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인력은 분명 정권 출범 후 더 늘어난 셈이다. 말의 성찬이 아닌 실질적인 이행결과를 놓고 볼 때, 지표로 나타난 공기업 개혁은 정부의 의도와는 역행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정권의 개혁추진 의지 약화.."전략도 없다"
공기업 개혁이 표류하고 있는 것은 공기업 노조, 정부의 공적 역할을 강조하는 관련 시민단체, 이에 편승하는 정치권 등 이해관계자(stakeholders)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로선 각종 선거 등 정치적 판단요인이 작용하면서 이들 이해관계자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 전직 고위관료는 "개혁이란 정권에 힘이 있을때 신속히 밀어붙여야 하는데 초반부터 촛불시위에 밀려 지지부진하더니 각종 선거 등 정치적 변수가 떠오르면서 추진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같은 환경적 요인 뿐 아니라 더욱 큰 문제는 정권 자체의 개혁 추진의지가 크게 약화됐다는 점이다. 정권초반 개혁 추진기구를 청와대에서 각 부처로 이관시킨 것은 정부의 개혁의지에 의문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실책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각종 산적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개혁 드라이브를 강력히 걸기 위해선 정권 차원에서 결집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청와대와 같은 범정부적 기구에서 개혁을 밀어붙여야 했다"며 "산하기관들의 이해관계에 구속될 수 밖에 없는 각 부처로 각종 개혁방안들이 분산되면서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지고 이해관계자들의 상이한 목소리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개혁추진에 대한 전반적인 전략, 특히 실행전략이 미비했던 점도 개혁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는 핵심요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모든 개혁이 그렇듯 공기업 개혁처럼 이해관계자들간 대립이 첨예한 경우 이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정치력, 경제적 유인책, 특히 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 여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전략 등 구체화된 실행전략이 필요하지만 현 정권하에선 이같은 전반적인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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