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택의 국경은 없다]⑨ 마이애미공항의 노숙자들

트립in팀 기자I 2018.05.29 09:49:56


[이데일리 트립in 임택 여행작가]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하고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차고 오르자 진동이 사라졌다. 내가 살던 땅이 한 점이 되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다가올 두려움이 과거의 것들을 빠른 속도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의 번잡함으로 잠이 깨고 들기를 되풀이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며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 원인은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내면의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다. 눈을 감고 그 존재를 찾아 마음속을 구석구석 뒤져보았다. 결국, 수년간 여행을 준비하며 소홀했던 아내의 모습을 찾아냈다. 나의 꿈을 이루려고 뛰어다니는 동안 아내의 자리는 없었다. 이를 지켜보며 착잡했을 아내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났다. 미안함이 다가왔다. ‘내가 돌아가면 나머지 인생은 아내의 꿈을 위해 살아야지’ 이제 여행의 시작인데 너무 빨리 철이 들었다. 어느덧 내가 탄 비행기가 낯선 땅에서 날개를 접고 있었다.

나는 LA를 들러 오랜 투병 생활로 지친 매부를 위로했다. 이제 떠나면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서다. 하나뿐인 누나는 내 어린 시절의 기둥이었다. 입대 1년이 지날 즈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했던 누나마저 미국에 이민을 떠났다. 나의 인생은 닻 잃은 배처럼 휩쓸렸다. 일찍 찾아온 방황과 시련은 나를 단련 시켰다. 나는 강해지는 방법으로 긍정의 근육을 단련했다. 나는 넉살이 좋으며 어느 곳에서도 낯설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세계 일주의 자신감도 바로 이 긍정의 힘에서 나왔을 것이다. 아픈 매부는 내 손에 천 달러를 쥐여주며 나를 위로했다.

마이애미 공항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내가 가지고 온 것은 ‘AA 항공’ 대기표였다. 생각과는 달리 리마행 좌석은 만석이었다. 그날 하루에만 두 대의 비행기를 보내야만 했다.

‘추수감사절’ 미국인들에게는 우리나라의 추석과 같은 명절이다. ‘아하! 그랬구나‘ 자리가 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됐다. 앞으로 있을 밤 11시 비행기 좌석 또한 만석이지만 나보다 우선하는 대기자가 한 명뿐이라는 직원의 말에 7시간을 공항에서 보냈다. 하지만 이 비행기는 과식하지 않는다는 듯 한 명만을 디저트로 먹은 뒤 떠나버렸다. 깊은 밤 마이애미 공항에서 버려진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역시 선택받지 못한 일인이 또 있었다. 페루 리마에 사신다는 73세의 ’다니엘‘씨다. 외로움과 두려움이라는 끈이 우리를 하나로 묶었다.

“호텔을 찾으실 거면 같이 가실래요?”

N 분의 1. 짠돌이 본능이 머리를 스쳤다.

“나 여기서 잘 거야. 이미 이틀을 여기서 잤는데 뭘”

마이애미 공항의 노숙자가 되었다. 먼지 냄새 퀴퀴한 탑승구 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려움을 당할 때 친구만큼 큰 용기를 갖게 해주는 존재도 없다. 영어를 아예 못하는 페루아노와 어눌하게 말하는 꼬레아노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긴 시간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랜 대화에 비교해 알게 된 사실은 초라했다. 그의 이름이 다니엘이라는 것. 나이가 73세이며 두 딸이 미국에 산다는 것. 페루 리마가 집이라는 것. 이것이 내가 해독해낸 이 우주인과의 대화 내용이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분이 비행기를 이미 네 번이나 놓쳤으며 성공할 때까지 대기한다는 것이다. 이분들의 조상도 마늘과 고추를 먹고 살았나 보다. 이 분도 AA 항공 페루 리마로 가는 대기표를 갖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여행의 첫 밤을 공항 대합실에서 노숙을 했다. 대기자가 단 두 명에 불과했지만, 그다음 비행기마저도 내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해당 항공사 직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게다가 앞으로 있을 비행기도 다 만석이라고 했다. 어쩌다 자리가 난다 해도 다니엘이 있는 한 양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지 않은가. 이 노인과 친구가 된 것이 후회스러웠다.



항공사 직원은 콜롬비아 소속 ‘에비앙카 항공’에 자리가 있다며 알려 주었다. 새벽 4시 AA항공 대기 예약을 취소한 후 이십여 분을 걸어 콜롬비아 국적의 ‘에비앙카항공’카운터로 갔다. 아직 자리에 여유가 있다고 했다.

“리마행 편도표 한 장 주세요. 가격이 얼마죠?”

“1,310달러입니다.”

듣는 귀를 의심했다. 여윳돈으로 1,500달러를 가지고 왔는데 다 털리게 생겼다. 이해가 가지 않으니 분노만 남았다. 나는 한국에 있는 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딸의 이야기도 별 수 없다는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란 이런 것이구나.

“여권 좀 주시겠어요?”

여권을 받아 보던 항공사 직원이 되물었다.

“페루 국민이 아니시네요? 이런 경우 왕복 표를 사셔야 합니다. 편도표는 페루 국민만 가능합니다.”

간혹 오해가 사태를 악화시킨다. ‘웬 국민차별이람? 아니 이 사람들이 배짱인가? 어차피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비싼 왕복표를 팔려는 파렴치한 장사꾼들이라니.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용기를 내야 해. 단단히 혼을 내야겠어.’ 눈치 없이 정의감마저 끼어들었다.

거의 한 시간 이상을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고 편도 표를 달라며 생떼를 썼다. 항공사 직원은 프린트된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써 보이며 완강하게 거절했다. 나를 옆으로 세워놓고 다른 손님들에게 표를 팔기까지 했다. 나는 화를 내다가도 틈틈이 사정했다.

“지금 저는 가진 돈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왕복표를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요 페루에서 버스로 세계여행을 떠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돌아오는 표는 소용이 없다고요.”

아무리 사정을 해 봐도 소용이 없다. 무조건 왕복표를 사야 한다는 의견이 완강했다. 내가 이러는 사이 여유 표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쉬운 쪽이 을이다.

“왕복표는 얼마예요?”

그는 종이에 1,438달러라고 써 주었다. 생각보다 큰 차이가 아니구먼? 직원이 컴퓨터로 입력하는 동안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마을버스 세계 일주로 갔다. 5년을 생각하고 고민한 이야기라서 인지 서툰 영어로도 술술 나왔다. 항공사 직원이 내 말에 관심을 보였다. 나의 이야기를 ’판타스틱!‘을 외치며 들어주는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나는 휴대폰에 저장된 마을버스의 사진들을 직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표를 검색하던 직원이 태도가 바뀌었다. 그토록 냉랭했던 직원이 싼 표를 알아보겠다며 사무실을 들락거렸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그가 내민 가격은 애초의 편도 표 가격보다 67달러 나 저렴한 1,246달러였다. ’브라보!‘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돈을 아끼게 되었다는 것보다 사람들이 나의 여행 가치를 알아주었다는 것이 더 기뻤다.



“그런데 서두르세요. 지금 바로 타야 합니다. 그런데 짐은 어디에 있죠?”

“AA 항공에 있습니다.”

“아이고 그럼 이 비행기도 타지 못하게 되셨네요. 짐을 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우리나라의 항공기와는 달리 AA 항공은 대기표 구매자에게도 일단 짐을 부친 후 탑승구에서 대기해야 한다. 이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결국, 받아 든 최종 탑승권은 오후 3시에 떠나는 리마행 직행표였다. 다행히 거의 동일한 가격이었다. 고객과 친구의 차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비행기에 오른 후 자리에 앉아 다시 한번 필담을 주고받았던 종이를 펼쳐 보았다. 직원이 실랑이를 벌이던 중 내밀었던 종이였다. 노란 줄을 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페루를 방문하는 자가 왕복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 입국을 불허한다’ 비로소 모든 오해가 풀렸다. 항공사 직원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토록 설명해도 못 알아들으니.

한국에서 구매한 대기표는 AA 항공 리마행 편도 표였다. 만일 내가 그 표를 가지고 AA항공을 무사히 탔다면 나는 페루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페루에 도착하여 입국이 좌절되었다면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를 낭비했을 것이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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