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파악을 위해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바로 ‘고객 심층 인터뷰’다. 얼마전에도 새 구두론칭을 위해 서울 시내의 한 백화점을 디자이너와 함께 찾았다. 어떤 분과 이야기(심층인터뷰)를 나눌까 물색하다 한 60대 부부로부터 인터뷰 허락을 받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안정감 있는 은퇴기를 보내고 있는 노부부였다.
그는 “그거 똥구두(사각형 앞코에 절개선이 불필요하게 많은 바닥 고무창의 블랙 남성화)예요. 내가 멋진 명품구두를 몇 개나 사드렸는데 꼭 저런 구두만 신고 다니신다니깐”이라며 불만을 토해냈다.
하지만 어르신이 소위 똥구두를 고집하는 이유 역시 분명했다. “편한 게 좋아요. 해외 명품구두는 발바닥이 아파서 못 신겠어. 창이 내 발에 안 맞는 것 같아”라고 약간은 머쓱해하며 말씀하셨다.
남성 시니어(40~60대의 남성을 실버세대와 구별해 부르는 말)에게도 편안한 드레스화가 필요하다. 편안하고 저렴한 구두는 와이프에게 무시당하고, 어느새 아내의 취향이 강제로 내 취향이 되어버린 시니어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까. 시장 조사 과정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필자의 생애 첫 구두는 중학교 진학 후 아버지로부터 받은 ‘맞춤구두(Bespoke)’였다. 성적이 크게 오르자 기분이 좋아지신 아버지의 격려 선물인 셈이었다. 발끝에 절개선과 장식이 없는 플레인토 스타일이었는데 이 구두는 검정 일색의 교복 사이에서 나를 폼나게 만들어 주었다. 플레인토 스타일은 미국 젊은이들이 원하는 첫 구두이자 지금의 시니어들에게는 첫 맞춤구두로도 잘 알려져 있는 클래식 구두다.
기성복이 자리 잡기 훨씬 이전부터 대한민국 남성들의 복식을 책임져온 소공동 등의 전국 맞춤양복점에도 진정한 ‘클래식 슈트’가 있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몸에 맞추어 피팅된 슈트와 통 넓은 바지, 포마드를 바른 사진 속의 매력적인 내 눈 앞의 이 남성이 진짜 지금 우리네의 ‘어버지’란 말인가.
남성 시니어들이 다가올 미래의 패션경향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남성 시니어들에게 분명한 영역표시가 필요하다. 그들의 직장 초년 시절부터 가장 익숙했던 ‘클래식’한 스타일은 지금도 손색이 없다. 적어도 클래식은 유행에 좌우되지 않는다. 분명히 트렌드를 넘어서는 힘이 있다.
스스로의 삶에 새 열정을 찾아 불어 넣어준 영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주인공들처럼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고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한 그들에게 ‘클래식’을 선물하고 싶다. 다시 한 번 멋지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기를. 브라보! 대한민국 남성 시니어.
박병철 EFC 마케팅기획실 이사 pete@esquir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