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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됐다. 1905년 한인친목회를 ‘공립협회’로 재창립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1907년 귀국 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했다.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1913년에는 ‘흥사단’을 조직해 민족계몽운동과 국권회복 활동을 펼쳤다.
1919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 대표 파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했다. 연통제를 실시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독립운동의 전략을 지도했다.
1923년에는 ‘대독립당’을 결성하고 1924년에는 남경에서 ‘동명학원’을 설립해 실력 배양 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1930년에 ‘동인호조사’를 조직해 한인들의 합심 협력을 이끌어 냈다. 1931년 1월에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해 대회장으로 선출되고 ‘흥사단보’를 발행하는 등 국민의 자질 혁신과 청년 인재 양성 등 흥사단의 이념 구현에 주력했다.
조국의 자주독립에 헌신하던 선생은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병을 얻어 12월 보석으로 출옥했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38년 3월 순국했다. 이후 망우리에 안장됐다가 1973년 현 도산공원으로 이장됐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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