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경민 기자] 40대 직장인 이 모 씨는 얼마 전 집 마련을 결심하고 2억원의 주택자금대출을 받았다. 그런데 대출을 받은 후 사흘 만에 회사에서 해외근무 결정을 받게 됐다. 이에 갑자기 주택자금대출이 문제가 됐다. 현재 사는 집의 전세금으로 대출금을 다 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에 문의한 결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어도 중도상환수수료 등 300만원을 물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씨처럼 이런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올해 도입하기로 한 대출청약철회권이 하세월이다. 지난해 금융당국에서 대출청약철회권을 소개할 때만 해도 올해 바로 시작할 것처럼 보였지만 은행권과 금융당국이 ‘엇박자’를 내면서 도입작업이 지지부진하다.
실무를 담당하는 은행연합회는 근거부족과 담합소지 우려 등을 이유로 약관 제작에 시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금융당국은 현행법상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데 시간을 끈다며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은행권 “법적 근거 모호하다…시간 걸려”
지난해 9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대출청약철회권을 올해부터 도입하겠다고 밝혔지만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은행연합회에서는 약관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금융소비자보호법안에 청약철회권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법이 통과되면 손쉽게 약관을 만들어 도입할 수 있지만 현행법상 법적 근거가 모호한 데다 공통안을 만들었을 때 담합소지도 있다는 게 은행권 주장이다. 중도상환수수료체계가 은행마다 다른 상황에서 금융권 공통안을 적용하는 것도 은행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다.
은행권 관계자는 “(금융소비자보호법이 있으면)관련 문제 해결이 쉽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로 약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관련 업계에서의 협의와 실무상 검토 등을 일일이 따져 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며 “이와 관련한 기획(TF)팀이 구성된 상태지만 신용정보 삭제 등 문제까지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데다 금융권 공통의 공통안을 만들면 담합 소지도 있어 사실상 논의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당국 “관련 약관 만드는데 문제없다” 압박
이에 대해 금융당국은 지나친 해석이라는 지적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현재 법 규정만으로도 관련 약관을 만드는 것에 문제가 없다”며 “절차상 은행연합회가 약관을 만들어와야 약관 심사 등을 진행할 수 있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관련 제도가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금융소비자의 권익 보호도 뒷전으로 물러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금융위의 발표 당시만 해도 은행, 증권사, 보험사, 카드사, 저축은행, 신협, 주택금융공사에서 받은 대출의 청약 철회가 올 1월부터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아직 대출청약철회권은 현재 도입은커녕 관련 절차에서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은행연합회가 관련 표준약관을 만들어 금융당국에 약관을 심사하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아직 관련 약관도 만들어지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청약철회권은 금융소비자의 신중한 금융의사 결정을 유도하고 약탈적 대출로부터 금융소비자를 보호해 가계부채 증가를 억제하는 등 긍정적 효과가 있다”며 “현재 가계의 부채부담이 큰 편이고 고금리 가계대출에 따른 피해도 작지 않아 조속히 금융권에서 청약철회권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대출상품 청약철회권은 취약계층으로 대상을 한정하고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으로 다른 금융소비자에게 비용이 전가될 우려도 있어 단계별로 적용해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 용어설명 대출청약철회권=대출청약철회권은 금융회사에서 받은 대출을 중도상환수수료 없이 7일 이내에 철회할 수 있는 제도다. 금융소비자가 대출계약에 대한 숙고기간 동안 대출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 대출계약이 해제되면 계약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되므로 중도상환수수료 없이 원리금 등(부대비용 포함)을 상환해 대출계약을 탈퇴할 수 있고 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출기록도 삭제된다. 적용대상은 개인 대출자로 리스를 제외한 담보 2억원 이하, 신용대출은 4000만원 이하 모든 대출이다. 보험계약대출은 중도상환수수료가 없어서 제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