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이번주 "환리스크 관리의 주역들" 대상자는 현대중공업 조영철 차장입니다.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입사 후 줄곧 자금업무만 맡아오셨는데.
▲현대중공업 입사 후 첫 업무는 회계관리였습니다. 당시 국제금융팀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보니까 굉장히 부럽더군요. 회계관리는 남이 딜링한 것을 가지고 매일 정리만 죽어라고 하는일인데 말이죠. 마침 결산당시에 회계업무에 배치받았기때문에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산더미같은 일은 끝도 없는데 딜링은 잘하든 못하든 그날 일이 바로바로 끝나잖아요.
그래서 옮기겠다고 결심했는데 못 갔습니다. 하하. 그러다 91년도 원화자금팀장을 맡게 됐어요. 당시 제 직급이 대리에 불과했는데도 어려운 업무를 맡겨 주시더군요. 이후 2년정도 하다가 벨기에로 떠났습니다.
앤트워프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시골에 살았는데 제가 상주한 첫 한국인이었을 겁니다. 첫애가 갓난아기였는데 집사람이 애기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니까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당신 남편을 안다고 했답니다. 어떻게 아냐고했더니 "외국사람 중 양복입고 차 몰고 매일매일 회사가는 사람은 당신 남편밖에 없다"고 하더랍니다. 뭐 하는 사람이길래 그렇게 열심히 일하러 나가냐면서 무척 궁금해했다나요.(웃음)
-벨기에에서 하시던 업무를 좀 자세히 들려주세요.
▲사실 가기 전에는 영어권 국가로 발령받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좀 있었습니다. 그 차례를 기다리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우선 벨기에를 간 건데 지금 생각하니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권에 갔으면 다루는 통화가 달러 외에 한 두개였겠지만 유럽으로 떠난 후 당시 거래되던 웬만한 통화는 다 다뤄봤습니다. 벨기에 프랑을 비롯해서 달러, 마르크, 파운드, 프랑스 프랑, 스위스 프랑, 길드, 리라, 페세타 등 꼽을 수도 없어요.
미국이 크긴 크지만 당시 유럽도 통합을 선언하고 매우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다 국제금융이고 배울 점이 많았어요. 한국과 달리 달리 오버나잇 주문을 내고 다음날 아침 거래가 체결되니까 이것저것 해 볼 수 있었죠. 옵션을 비롯한 다양한 파생상품 거래도 처음 해봤습니다.
외환업무에 대한 감을 느끼는 것은 물론 유럽시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소득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처음엔 낯설어서 가족들도 고생을 많이했지만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4년동안 돈 모으는 대신 여행도 상당히 많이 다녔는데 여행하면서 돈 쓰는 것도 외환업무와 연결지어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유럽 쪽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다싶으면 "아 이게 이렇게 돌아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속으로 휙휙 스쳐요. 심지어 그 나라 공기까지 떠오른다니까요.(웃음)
-당시 수익률대회에서 1등을 하신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1등이라고 하면 쑥스럽고 그냥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ABN암로에서 벨기에, 룩셈부르크에 있는 외국업체 고객들을 초대해서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흔한 세미나였는데 저도 한국 사람인지라 "교육 좀 하고 나머지는 놀겠지 뭐. 기분전환이나 하러가자"는 생각을 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침 9시에 도착했더니 오전까지 모든 프레젠테이션을 다 마치고 오후부터 곧바로 실전에 돌입하는 겁니다. 실전 트레이딩을 통해 외환업무를 몸소 익히게하고 이익을 많이 낸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는 형식이었죠. 일본 사람도 없고 동양인은 거의 없어서 잔뜩 긴장했습니다.
교육기간은 2박3일로 짧았는데 이틀내내 밤 11시까지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첫날 저녁에 주최 측에서 누가 미스터 조냐고 묻더군요. 저라고 답했더니 "당신이 1등" 이라고 말해줬습니다. 저는 첫날부터 여러 통화를 샀다 팔았다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한 통화만 계속 사고팔고 하더군요. 그러니 집중도가 높을 수 밖에 없었고 둘째날에는 1등을 뺐겼습니다. 마지막날 오전에 간신히 만회할 수 있었어요.
밥 먹을 때 빼고는 교육만 시키는 그 빡빡한 일정에 놀랐지만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외국인들이 트레이딩 하는 법, 주위 환경변화에 대처하는 법을 공부해야겠다" 고 생각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이후 매일 거래하는 은행 딜링룸에 자동 콜을 신청해서 시시각각 시장상황을 체크하게 됐습니다. 당시 거래규모는 크지않았어요. 이 때 아니면 이 업무를 언제 배우겠냐는 심정으로 달려든 게 주효했습니다.
-여러통화를 다루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통화는.
▲파운드가지고 고생한 적이 많았습니다. 벨기에 프랑은 마르크와 움직임이 거의 흡사하지만 파운드와 거래할 때는 변동성이 매우 심했습니다. 팔면 무조건 헤지를 걸어줘야 하는데다 파운드는 마진도 조금밖에 안남는 통화여서 아주 애먹었습니다. 이걸 가지고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손실을 줄이겠다는 심정으로 접근했더니 결과가 좋았습니다.
-돈을 많이 번 적은 언제입니까.
▲거래규모가 작았으니까 많이 벌었다고 하기는 뭐하죠. 벨기에 프랑이 약세로 가는 와중에 본사에서 500만달러 한도를 받아 반대거래를 잘 잡은 적이 있습니다. 그 거래로 단숨에 20만달러를 벌었죠.
-국제금융시장에서 거래하는 것과 국내외환시장에서 거래하는 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아직도 개입이 많은 편이라 시장참가자들이 예측하기가 쉽지않은 것 같아요. 어느 쪽으로 움직일게 확실한데 정부가 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기잖습니까. 거긴 개입이 거의 없으니까 애널리스트들의 전망이 상당히 잘 맞아요. 딜러도 이러한 뷰를 토대로 가이드를 잘 해주니까 전략을 짜는 것이 굉장히 편했습니다. 한국의 은행딜러들도 자질 면에서는 뒤진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시장 예상과 빗나가는 일이 많은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현대라는 이력만 가지고는 금융업무와 언뜻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현대 문화가 남자다운 면이 강하지만 저는 다그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대 이미지가 강하고 회사도 삼성이 어울린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하지만 어쨌든 현대에 입사했고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헤지의 정의는 어떻게 규정하십니까. 왜 헤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세요.
▲현대중공업이 제조업체니까 투기거래는 하면 안 됩니다. 특별한 투기목적이 아니라면 고점에 팔고싶어도 어느 정도는 욕심을 제어할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해요. 맨날 발목에서 잡아서 머리에서 팔 수는 없잖아요. 머리에서 팔고 싶어도 어깨에서 팔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죠.
꾸준히 포지션을 털되 꾸준히 이익을 내야 최대수익을 낼 수 있습니다. 한 번에 지르겠다는 생각을 가져서 망한 회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막 유럽에 도착했을때 베어링 사건이 터졌는데 방송만 틀면 닉 리슨이 체포당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때 뼈저리게 느꼈죠.
-현대중공업에서의 외환업무는 다른 업체와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있을까요.
▲우선 거래규모가 크니까 큰 규모를 꾸려나가면서 많은 공부를 해야하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죠. 많은 굴뚝업체 중 세계 1등이라고 내세울만한 회사는 많지 않아요. 반도체, 자동차도 마찬가지지만 규모가 워낙 크니까 두드러지는 겁니다.
한때 IT 바람이 불면서 사람들 관심이 그 쪽으로 우르르 쏠렸지만 현대중공업은 누가 뭐래도 조선업계 세계 1위 회사입니다. 기술력, 매출규모 등 어느 부문도 마찬가지에요. 현대그룹 안에 있다는 점을 이유로 불이익도 많이 받았지만 결국은 가치주가 평가받는 시대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조영철 차장 약력
1961년 부산 출생(본적 부산)
1980년 부산 금성고 졸
1988년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
1988년 현대중공업 재정부 입사
1995년 벨기에 현지법인 관리부장
1999년 현대중공업 재정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