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25시] "걔네, 착한 애들이에요"

김보겸 기자I 2020.07.13 09:30:01

'클럽 폭행치사' 태권도 전공생 항소를 보며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악인'을 떠올리다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일본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악인>(2006)에는 소위 ‘영 앤 리치’ 대학생 마스오가 나오죠. 평소 모든 여자들의 관심을 받던 그는 바에서 만난 보험설계사 요시노에게 번호를 건넵니다. 가볍게 만날 생각에서였습니다. 이후 연락해 온 요시노를 차에 태우고 달리던 마스오는 마치 연인인 양 행동하는 그녀의 행동에 질려 차를 세우고 발로 차 내쫓습니다.

도로 한 가운데에 버려진 요시노에게 또 다른 남자가 다가옵니다. 온라인을 통해 만나 요시노와 몇 번 잠자리를 했던 ‘흙수저’ 일용직 유이치였습니다. 순간 요시노는 내쫓긴 자신의 모습을 들켰다는 창피함에 그에게 성을 냅니다. “성폭행했다고 신고할 거야! 납치해서 강간했다고! 난 너 따위 남자랑 사귈 여자가 아니야!” 유이치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맙니다.

소설은 제목처럼 묻습니다. ‘이 살인사건에서 과연 누가 악인인가. 요시노의 목을 조른 건 유이치다. 하지만 요시노에게 모욕을 준 마스오는 과연 이 사건에서 책임이 없는가’ 하고 말이죠.

(사진=이미지투데이)
소설을 떠올린 건 ‘클럽폭행 살인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9년을 받은 대학 태권도 전공자 3인방의 1일 항소 소식을 듣고서였습니다. 이 중 눈길을 끈 건 항소장 제출 순서였는데요. 1심에서 3명에게 각각 징역 12년을 구형한 검찰이 항소하기 무섭게 피해자와 최초 시비가 붙은 이모(21)씨도 항소장을 냈습니다.

애초에 이씨가 피해자 A씨와 시비붙지 않았다면 비극은 없었을 지 모릅니다. 여섯 달 전인 올 1월1일. 이씨는 새해를 맞아 친구들과 찾은 서울 광진구 화양동 클럽에서 한 여성의 팔을 잡았습니다. “여기 와서 같이 놀아요.” 여성의 남자친구인 A씨가 나타나 시비가 붙자, 이씨는 그의 멱살을 잡고 클럽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이씨의 친구 김모(21)씨와 오모(21)씨도 따라 나섰구요.

이씨는 끌고 나온 피해자를 두 차례 밀쳐서 넘어뜨렸습니다. 태권도 유단자 3명에게 둘러싸인 피해자는 입고 있던 패딩이 벗겨질 정도로 폭행 당했습니다.

“너네 인생 X됐어.” 몸을 추스른 A씨가 이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 말에 김씨와 오씨는 흥분했습니다. 최초 시비가 붙은 건 이씨인데 이들은 왜 당사자보다도 화가 났을까요. 김씨는 “술김에 기분이 나빴다”고, 오씨는 “실제 뇌종양이 발견돼 선수 생활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울하던 터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피해자를 상가 안으로 들어가 무차별 폭행했습니다. 그렇게 23세 청년 A씨는 새해 첫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1심에 가장 먼저 불복한건 바로 클럽 안 시비를 촉발한 이씨였습니다. 그는 줄곧 “클럽 안에서 시비가 붙은 건 맞지만, 피해자를 사망케 한 상가 안 폭행에는 가담하지 않았다”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살인 의도가 없었다며 상해치사 혐의 역시 부인했구요. 따라서 무죄를 선고해 달라. 올해 2월13일부터 5차례 서울동부지법에서 진행된 공판에서 그의 일관된 입장은 이랬습니다.

소설 <악인> 속 요시노의 죽음을 대하는 마스오와 현실 재판에서 이씨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딸을 잃은 요시노의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온 후 마스오는 친구와 이를 웃음거리로 삼습니다. “그 영감이 난데없이 멱살을 잡더니 ‘너 때문에 내 딸이 죽었어’라면서 달려드는 거야. 그 영감 얼굴, 진짜 웃기더라”라고.

피해자의 모습이 웃겼던 건 이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범행 직후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 폐쇄회로(CC)TV에는 피해자가 맞는 소리, 쓰러지는 모습을 따라하며 웃는 그의 모습이 담겼습니다. 요시노의 분노를 촉발해 사망사건의 불씨를 당긴 마스오는 법적 책임을 피했지만 우리나라 법원은 이씨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걔네, 착한 애들이에요.” 모두에게 징역 9년이 선고된 후 피고인들의 담당 변호사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의 입고 끌려나와서 그렇지 양아치 이런 애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9년씩 (선고)하면 안 되지.” 그는 한참을 “지은 죄와 형은 적당해야지 수긍한다”며 1심 선고가 지나치다고 항변했습니다. 이어 가족과 상의한 후 항소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의뢰인이 ‘착한 애들’이라며 ‘적당한 형벌’을 주장한 그의 항소에 소설이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과연 악인은 누구인가. 적당한 형벌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이미 1심 법원은 이 질문에 답한 바 있습니다. 사망 사건의 불씨를 당긴 자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들 모두는 법이 판단한 만큼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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