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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과 관련, 미8군을 나오면서 신중현은 초창기를 수놓은 역사적인 밴드 ‘애드포’를 만들었고 한국의 비틀스로 불린 ‘키보이스’는 김희갑이 악단장으로 있던 미8군의 에이원 쇼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신중현은 이후 덩키스, 퀘션스, 엽전들 등 밴드의 리더로 맹활약했고 또 신중현 사단이란 수식이 일컫듯 가수들의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렸다. 김희갑 또한 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을 비롯해 트리퍼스나 라스트찬스 등 많은 톱 밴드에게 곡을 주거나 음반 프로듀싱에 참여했다.
편승엽의 ‘찬찬찬’을 쓴 작곡가 이호섭은 언젠가 “한국 록은 주로 신중현이 주도한 흐름을 기억하지만 김희갑이 닦은 또 하나의 흐름, 그 두 갈래가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두 사람의 길은 달랐다. 신중현이 록과 그 스피릿에 철저히 수절해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면 김희갑은 양식을 불문하고 대중의 감성에 부합한 음악에 봉사했다.
록뿐 아니라 팝(이선희 ‘알고 싶어요’), 포크(양희은 ‘하얀 목련’), 댄스(혜은이 ‘열정’) 등 장르에 대해 놀라을 만치 왕성한 식욕을 과시했다. 팝 스타일의 가요를 주류로 끌어올렸다는 고평과 히트곡 제조기라는 찬사가 뒤따랐다. 김희갑의 음악은 1970년대 후반에 ‘노랫말의 여제’ 양인자와 조우하면서 대중적·예술적 정점을 찍는다. 두 사람의 경이로운 ‘합’(合)은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김국환의 ‘타타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그 겨울의 찻집’ 등 몇 곡의 예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알고 싶어요),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걸쳤잖소’(타타타),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킬리만자로의 표범),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그 겨울의 찻집) 등 양인자가 써낸 깊이 있는 감각의 가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실로 경이의 산물이다.
성악과 대중가요의 크로스오버로 가요사의 역작으로 꼽히는 1989년 이동원·박인수가 부른 ‘향수’의 경우도 김희갑이 정지용의 시를 선율로 옮긴 것이지만 양인자의 조력과 응원이 크게 작용했다. 김희갑이 선율로 만들기에 까다로운 시어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아내 양인자는 “당신은 해낼 수 있다”며 자신감을 북돋웠다고 한다. 이 곡의 멋지게 굽이치는 선율, 그 진행의 아름다운 아치는 가히 서술이 불가능할 정도다.
최근 김희갑과 양인자의 일대기를 엮은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이 개봉했다. 양희 감독은 ‘김희갑과 양인자의 기록을 남기자’는 선의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영화에 등장하는 전설의 디바 혜은이는 “두 분의 활동 이력을 영화로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본인의 삶도 공식 실록으로 저장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했다고 한다. 최근 대세가 된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통해 서구 음악가 다수의 다큐멘터리가 공개되고 있다. 기록에 취약한 우리도 이제는 음악가 다큐멘터리 제작을 서둘러 사료화해야 한다. 외국인들도 K팝 이전의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