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대로 미국은 세계 최대의 부채 국가다. 부시 집권 이후 눈덩이처럼 증가한 경상적자와 재정적자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가계 부채 문제도 만만치 않다.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가 수면 위로 등장하면서 개인들의 신용 위험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모기지 시스템의 확립 등으로 미국인들은 미래의 소득을 미리 끌어다 쓰는 행태에 너무나 익숙해져있다. 하지만 집값 상승으로 소득 증가 대체 효과를 향유하던 미국인들은 최근 늘어나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처지로 몰렸다. 미래 소득을 당겨와 현재의 빚을 갚지 않으면 집이 압류당하고 파산이 불가피하지만 미국의 저축률은 벌써 23개월 연속 마이너스 권에서 맴돌고 있다.
IMF 위기와 맞먹는 `신용카드 대란`을 경험한 바 있는 한국인들은 그 후폭풍이 얼마나 엄청난 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반 미국인들에게 신용카드 대란이라는 단어는 생소할 뿐이다.
자신의 소득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카드를 사용한 개인들이 댓가를 치러야한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신용카드 부실 문제가 과연 개인들의 잘못이기만 한 것일까? 이 과정에서 신용카드 업계의 잘못된 행위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미국의 독립 영화감독 대니 셰터(Danny Schechter)의 신작 다큐멘터리 `우리는 부채를 믿는다(In Debt We Trust : America before the bubble bursts)`는 이 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영화의 제목은 미국의 모든 화폐 뒷면에 새겨진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를 패러디한 것이다.
이 영화는 2조달러가 넘는 미국의 신용카드 및 자동차 할부 부채가 단지 부주의하고 무분별한 개인들의 과소비 때문에 생기는 것만이 아니며 신용카드 업계의 비행도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니 셰터는 신용카드 회사의 마케팅 책임자, 상원의원과 주지사, 법대 교수, 소비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개인파산 신청을 까다롭게 하는 것을 골자로 지난 2005년 발효된 미국의 새 파산법을 위해 신용카드 업계가 1억5400만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들여 로비를 했다는 것, 신용카드 회사들이 일부러 법대 교수들도 이해하기 수준의 어려운 이용 약관을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명기한다는 것 등은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들이다.
새 파산법 제정을 위해 카드업계가 펼친 로비 작전은 일반적 예상을 능가한다. 전 조지아 주지사 로이 반스는 자신이 주지사로 재직하는 동안 가장 끈질기고 집요하게 로비를 펼쳤던 사람들이 신용카드 업계 관계자라는 점을 증언한다.
새 파산법은 개인 파산보호 신청에 상당한 제한을 가하고 파산 보호를 신청하기 전 전문적인 신용 컨설팅을 받도록 명시하고 있다. 과거 연방 파산법 7조는 특정 자산이 완전히 몰수된 뒤에는 판사가 개인들의 채무를 경감해 줄 수도 있었으나 새 파산법 하에서는 평균 이상의 소득을 버는 사람들이 파산법 7조의 적용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만일 누군가가 자기 빚을 갚지 않는다면 결국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이 대신 그 빚들을 상환해야 한다"며 법 개정의 불가피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카드회사와 은행 등 금융업계의 끈질긴 로비에 의해 법 개정이 이뤄졌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은 모두 이 법안에 찬성했고 상당수 민주당 의원과 무소속의 짐 제포드 의원도 법안 개정을 지지한 바 있다.
씨티그룹의 마케팅 책임자로 일한 바 있는 스티브 바넷의 인터뷰는 더욱 흥미롭다.
그는 한 카드회사의 광고를 예로 들며 신용카드 모객이나 광고, 추심 등에도 조직적인 소비자 기만 행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담배에 사용에 대한 경고 문구가 붙어있는 것처럼 카드 사용에도 응당 재정 문제에 경고가 필요한 데 카드 회사들이 도의적으로 이를 회피하고 있다는 논리다.
단란한 가족이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아버지가 아들과 야구 게임을 즐기는 상황에서 신용카드가 등장한다. 광고 문구는 다름아닌 `Priceless(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바넷은 "신용카드 회사들은 카드 사용이 부채가 늘어나는 행위가 아니라 가족의 가치와 신뢰를 확대하는 행위라고 교묘하게 포장한다"고 주장한다.
셰터는 영화 속의 대사를 통해 "흔히 사람들은 모든 경제 충돌이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서 생긴다고 착각하지만 진짜 충돌은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영화를 보고나니 맨해튼의 타임스퀘어 광장을 지나칠 때 마다 시선을 자로잡는 미국의 `국가부채 시계(The National Debt Clock)`가 새삼 떠올랐다. 부채시계 웹사이트(http://www.brillig.com/debt_clock)에 표시된 16일 현재 부채는 8조8916억7414만달러다. 미국민 1인당 부채가 2만9478.73달러라는 의미다. 1인당 3000만원의 빚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미국인. 아무리 세계 1위 국가의 시민이라 해도 그 삶 역시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셰터의 주장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이 영화가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미국의 가계 부채와 낮은 저축률, 이로 인해 더욱 심화하는 경상적자와 달러 약세, 그리고 재정적자...이 모든 문제는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몰고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비 여력이 줄어들면 그간 전 세계 경제와 주식시장을 지지해 온 `미국의 소비-중국의 생산` 체제의 종말이 불가피하다. 그 후폭풍은 거론하기조차 끔찍하다. 과연 미국은 버블이 터지기 전에 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