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⑬박광철 금융감독원 팀장(상)

정명수 기자I 2001.06.01 15:11:07
[edaily]금융감독원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금융구조조정과 기업구조조정을 현장에서 직접 처리한 조직이다. 정책구상은 재정경제부나 금융감독위원회에서 하더라도 금융시장의 실태와 정책의 실질적인 집행 방법 등은 금감원의 실무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율됐다. 금감원의 자산운용감독국은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투신산업의 문제를 처리하고 시장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금감원 자산운용감독국의 박광철 팀장이다. 박 팀장은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사건과 사고가 있는 곳”에 늘 나타나서 일을 처리한 베테랑 ‘해결사’다. 증권감독원 시절,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촉발된 삼보증권 사태를 처리한 것을 시작으로 외환위기 이후에는 투신권 구조조정, 대우사태, 시가평가제도 적용 등을 담당했다. 우리나라 채권시장의 한 축을 이루는 투신권은 IMF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폭풍의 눈’이었다. 투신권의 자금이 어떻게 이동하느냐에 따라 채권시장을 비롯한 금융권이 초긴장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다. 올 2월 채권수익률이 급등할 때도 투신권의 MMF 자금이 급격히 빠져나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아 시장관계자들을 긴장시켰다. 박 팀장은 “투신사들이 MMF를 마치 전략상품처럼 생각하는 풍토가 없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며 “일반 국민들이 신탁상품의 특성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팀장은 “금융시장이 고도화되고 자산운용시장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여러 금융권에 흩어져 있는 규정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연기금을 활성화 시키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금융시장에 투자할 수 있는 연금과 보험권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한다”고 말했다. 우니라나 금융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투신권의 변화를 현장에서 바라봤고 새로운 정책시행을 주도했던 박 팀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박광철 팀장 약력은 인터뷰 기사 하단 참조) <반골기질 강한 법학도, 증권감독원에 입사> -증권감독원에 입사하신 것은 몇 년도입니까. ▲1982년 7월입니다. 1982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한답시고 엉뚱한 일을 하다가(웃음) 입사가 좀 늦었어요. 석박사는 입사 후에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것은 언제인가요. ▲1975년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그해에 건국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75년 당시 덕수상고를 졸업하셨다면 은행 등 금융기관으로 취업해서 예정된 코스를 밟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제가 약간 반골기질이 있어서요. 누가 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제가 고집해서 덕수상고를 들어가긴 했는데 입학하고 나니까 저랑 영 안맞는 겁니다. 졸업조건이니까 주산, 부기자격증도 따고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구요. 친구들이 좋은 은행에 취직하는 것을 보면서도 말이죠. 대학을 가겠다고 결심은 했는데 그 당시 상업고등학교의 과목 중 대학입시와 관련된 것은 영어 하나였습니다. 수학같은 과목은 아예 수업을 들어본 적도 거의 없어요. 그래서 혼자 영어공부만 하다가 장난삼아서 재학중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덜컥 붙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상고에서는 3학년 때는 취업이 되면 학교수업을 제대로 듣지않아도 감안이 되거든요. 그래서 "됐다. 이제는 대학공부만 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입시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군대는 언제 마치셨나요. ▲학교 입학하자마자 군대에 갔죠. 1975년 7월인가 8월에 말입니다. 78년에 제대하고 그 이듬해 복학했습니다. -대학졸업 후 6개월 동안 무슨 공부를 하셨습니까. 사법고시 준비인가요. ▲물론입니다. 증권감독원 입사 후에도 계속한걸요. 계속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증감원 입사 후 업무에 젖어들다 보니 어느 순간 그 꿈과 멀어졌어요. 제가 증감원에 입사하자마자 "증권산업 전산화"가 시작됐습니다. 당시가 82년이었으니까 국보위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였죠. 국보위가 국가 전산작업을 추진하면서 일본에서 유니백 시스템을 도입했어요. 기기를 들어오게 된 배경에는 구구한 설이 있지만 어쨌든 그 비싼 기기를 들여와서 활용할 길을 찾다가 "증권산업 전산화에 사용하자" 고 결론이 났던 겁니다. 업무를 담당하면서 위탁자원장과 신용거래장까지 모두 제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석사는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처음에 들어와서는 업무때문에 눈코뜰새 없이 바빴어요. 사법고시에 대한 미련도 포기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고시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자 "아 이래선 안되겠다. 공부라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85년에 석사공부를 시작했습니다. 88년에 석사를 마치고 일이 바빠서 한 해 쉬다가 89년 다시 박사코스를 밟았죠. 그런데 일 때문에 아직까지 학위논문을 못 쓰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허허 -사법고시를 준비하시던 분이 어쩌다가 증권감독원에 들어오게 됐나요. 궁금합니다. ▲제가 법학을 공부하면서 만난 두 분의 은사가 계십니다. 한 분은 지금도 건국대학교에서 상법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이시고 다른 한 분이 바로 양병회 교수님이시죠. 제가 양 교수님을 무척 따랐는데 양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입사를 권하셨습니다. 추천서가 왔는데 거기 가라고 말씀하시면서요. "거기 들어가서도 고시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증권감독원 공채 3기로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들어와서 보니까 공부할 시간이 전혀 없더군요.(웃음) -그럼 증권감독원이 뭐하는 곳인지를 모르고 입사하셨군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시험볼 때는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들어와서 일을 하다보니 공부가 더 필요한 직장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석사를 양 교수님 밑에서 마쳤죠. 그런데 박사과정에 진학하려고 하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제가 해온 공부가 좀 달랐어요. 대부분 석사와 박사를 같은 지도교수님 밑에서 밟지만 저는 박사는 다른 교수님 밑에서 했습니다. 일과 관련된 쪽으로 공부방향을 바꾼 거죠. -유니백 시스템 업무를 맡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당시 저는 유통시장국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윗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상고를 졸업하고 대학에선 법학을 전공한 제가 유용하다고 느낀 것 같아요. 회계와 법을 동시에 아는 사람이 드물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무렵 삼보증권의 완매사태가 터졌습니다. <사건이 있는 곳에 늘 나타나는 해결사> -그것이 언제죠? ▲82년입니다. 81년에 그 사건이 터져서 82년까지 계속됐어요. 요즘 환매조건부채권있죠? 그것을 당시에는 완매채라고 불렀습니다. 일명 전매라고도 하죠. *편집자 주 : 환매조건부채권(RP, Repurchase Agreements) 금융기관이 일정기간 후에 다시 사주는 조건으로 팔고 경과 기간에 따라 이자를 붙여 되사는 채권을 말한다. 채권 투자의 약점인 환금성을 보장한 것으로 지난 1981년 미국에서 예금은행의 단기자금 조달방식으로 처음 도입됐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중앙은행과 예금은행간의 유동성 조절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앙은 행인 한국은행과 예금 은행사이에 시중 통화 수위와 예금은행의 유동성 상황에 따라 수시로 RP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RP 만기는 보통 1∼15일 이내이며 자금 결제는 주로 한국은행에 예치된 지급준비금의 대차거래로 이뤄진다. 채권가격은 계속 떨어지는데 빌린 돈은 점점 늘어나 채권을 다 팔고도 돈을 갚을 수 없게 됐습니다. 평가손실이 이자부분만큼 계속적으로 누적됐고 이것이 뻥하고 터져버린 것이 바로 삼보증권 완매사태입니다. 이 사건이 회계시스템을 금융거래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고 그 업무에 매달렸습니다. -그 때도 어쨌든 채권과 관련된 일을 하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증권업계 전산화 업무도 같이 했으니 정신없었죠 뭐. 원장 만드는 일, 대체전표 다루는 일 등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일을 시작하려니 무척 힘들었어요. -그 다음 다른 부서로 이동한 건 언제입니까. ▲삼보사태 처리 후 검사총괄국에서 잠깐 근무했습니다. 검사국에 있으면서 대리 승진시험을 봤는데 시험성적이 나쁘지않은 편이어서 상사 중 한 분이 정보분석과로 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당시가 증권감독원의 조사국이 막 창립되려는 단계였어요. 조사국에서 초기화단계 업무정립을 하고 다시 검사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검사국에서 2년 정도 일하자 이번에는 분쟁조정위원회 신설이라는 것과 마주치게 됐어요. 분쟁조정위원회로 갈때 과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분쟁조정위원회의 제도를 도입하고 규정을 일일이 만들고 겨우 한숨 돌리고 나니 투신 각서파동 사태와 직면했습니다. -투신 각서사태가 몇 년도인가요. ▲95년에 터졌습니다. 그 당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일을 수습하느라고 이리뛰고 저리뛰었습니다. 96년까지 계속 그 뒤치닥거리를 했는데 위에서 공부를 더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습니다. -어느 지역에 있었습니까. ▲콜로라도였어요. 콜로라도 주 덴버에 1년 동안 있었습니다. 제 자랑 같습니다만 1년 동안 43학점이나 땄죠. 그 곳의 학제는 1년이 3학기로 이뤄져있는데 매학기마다 3학점 과목을 서너개씩 듣곤 했습니다. 골프도 배웠구요.(웃음) <외환위기의 한가운데에서 투신사 구조조정을 담당> -귀국해서 맡은 업무는 어떤 일이었나요. ▲97년 돌아오니 바로 고려증권 일이 터졌어요. 증권업계에 IMF 여파가 들이닥친 것이죠. 대통령 선거와 관련돼 증감원의 계좌추적 사건도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어요. 청문회 열리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 때 일을 마무리하고 고려증권, 동서증권이 터지면서 현장으로 파견을 나갔습니다. 대책반에서 기획업무를 맡으면서 자금조달, 수습방법 제시를 하다가 "현장감독이 필요하니 현장으로 나가라"고 하셔서 나가게 된 겁니다. 이번엔 신세기 투신이 터진다고 해서 인천으로 가라고 해서 인천으로 갔죠. 금감위가 98년 4월 2일부로 발족되니 그 업무를 이관받으라고 해서 98년부터 또 투신과 일하게 됐어요. 한남투신 사태가 터졌구요. 현대투신과 맞물려서 일하던 중 금융감독원 자산운용감독국에서 4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사건이 터지는 곳에만 있었던 셈이죠.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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